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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 이대생들의 자력구제

흉악 범죄, 인권유린처럼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이 공분을 스스로 풀 수는 없다. 우리는 문제 해결을 공권력, 법의 심판에 맡긴다. 개인이 자기 힘으로 권리침해를 해결하는 것을 법률적으로 자력구제라고 한다. 사법절차가 확립되지 않았던 고대사회에선 그게 통했지만 문명사회에선 그럴 수 없다.

그런데 이 법의 심판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어쩌나. 공권력이 무능하고 부패해 나의 삶을 짓밟는 악인을 처벌하기는커녕 도리어 그쪽 편을 들어준다면. 분통 터지지만 현실에선 달리 방법이 없다. <아저씨>나 <테이큰> 같은 사적 복수극 영화가 팔리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직접 응징하고 싶지만 그럴 엄두를 못 내는 ‘준법 시민’들에게 카타르시스와 대리만족을 주니까.

2002년 3월 경기도 하남 검단산에서 머리에 공기총 6발을 맞고 한 여대생이 참혹하게 살해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이화여대 법학과에 재학 중이던 하모씨(당시 23세)는 자신의 사위와 하씨가 불륜관계라고 의심한 한 중견기업 회장의 전 부인 윤모씨(68)에 의해 청부살해됐다.

 

 

  이화여대 동문 커뮤니티 '이화이언'이 3일 일간지 1면에 낸 광고

 

이후 하씨 아버지의 범인 추적 노력이 눈물겹다. 그는 외국으로 달아난 범인 2명의 행적을 쫓아 필리핀, 중국까지 직접 뒤지고 다녔다. 우리 경찰도 인터폴에 적색수배를 요청하는 등 검거 노력을 기울였다. 아버지는 1년 후 이들이 검거되기까지 약 2억원을 썼다고 한다. 돈도 돈이지만 이국땅에서 딸 살인사건을 ‘자력구제’해야 했던 그의 심정은 헤아리기 어렵다.

며칠 전 경향신문 등 1면에 실린 “대한민국에서 더는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용납되지 않길 바랍니다”란 광고가 눈길을 끌었다. 이 광고는 이화여대 동문 커뮤니티 ‘이화이언’이 주도한 모금을 통해 이뤄졌다. 계기가 있다. 최근 SBS TV <그것이 알고싶다>가 이 사건을 다루면서 주범 윤씨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도 석연치 않은 이유로 긴 기간 동안 감옥 아닌 병원 특실에서 생활해왔다고 공개한 것이다. 진단서의 신뢰성도 의문이라고 한다. 방송이 나가기 전 검찰은 부랴부랴 형집행정지를 취소하고 그를 재수감했다. 광고는 허위진단서와 형집행정지에 대한 진실 규명을 요구했다. 이것도 법의 정상 작동을 의심케 하는 사회가 만든 또 다른 형태의 자력구제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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