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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 ‘모래시계 검사’의 착각

진주의료원 폐업이 드라마라면 주인공은 단연 홍준표 경남도지사다. 시종 폐업에 앞장서고 지휘했으므로 주연 겸 감독일 수도 있다. 폐업을 강행해야 했던 그의 심경은 어땠을까.

며칠 전 그는 연합뉴스에 “검사 시절에도 그랬지만 난 옳다고 생각한 일이면 타협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29일 폐업을 발표하면서는 이랬다. “선출직인 저도 표만 의식한다면 (강제 폐업을 안 하고) 모른 척 넘어가면 될 일이다. 그것은 제가 생각하는 정의도 아니고, 공직자의 도리도 아니다.”

자못 비장하다. 그리고 멋진 것 같다. 홍 지사에 따르면 진주의료원에 대해 매각 등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은 1999년 도의회에서부터 수없이 제기됐다. 그러나 47회에 걸친 경영개선과 구조조정 요구는 모두 노조에 의해 거부됐다는 것이다. 이 말은 폐업이 그토록 절실한 현안이었건만 아무도 손 못 대던 것을 자신의 결단으로 해냈다는 뜻 같다.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29일 도청 회의실에서 진주의료원 폐업에 따른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한 뒤 굳은 표정으로 퇴장하고 있다.



이름을 떨친 검사 시절을 의식한 말 같기도 하다. 그럴 만도 하다. 그는 만연한 부정부패와 비리를 소탕해 사회정의를 구현한 명검사다. 1993년 슬롯머신 사건을 수사해 박철언과 이건개 등 거물들을 구속시켰다. 이 사건이 1995년 초 SBS 드라마 <모래시계>의 소재가 되면서 그는 ‘모래시계 검사’란 별명을 얻었다. 진주의료원을 폐업하며 정의를 내세우는 홍 지사의 심중에는 정의로운 ‘모래시계 검사’의 추억이 깔려 있지 않았나 한다.

그러나 그 추억은 양날의 칼 같은 성격이 있다. 검사는 범죄 척결이 임무다. 좌고우면할 게 없다. ‘돌격 앞으로’의 칼만 잘 휘두르면 된다. 하지만 정치인이자 행정가인 도지사는 다르다. 사안을 폭넓고 종합적으로 볼 수 있는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진주의료원 문제의 본질은 공공의료다. 돈과 시장, 효율성은 그 다음에 따질 일이다. 그런데 그에겐 그게 먼저다. 그러니 돈이 없어 죽음으로 내몰리는 사회적 약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는 2011년 한나라당 대표 시절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를 희한한 논리로 ‘종북시장’으로 몬 일도 있다. 박 후보가 국가보안법 폐지나 천안함 사건에 대한 정부 책임을 주장하는 것이 북한과 비슷하므로 종북이라고 했다. 지금도 그는 검사와 도지사의 직무를 헷갈리는 것 같다. 또 아집을 소신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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