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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 녹색 지우기

박근혜 정부에서 녹색이 자취를 감췄다. 엊그제 환경부는 3개 국과 과의 이름에서 녹색을 뺐다고 한다. 녹색환경정책관은 환경정책관으로, 녹색기술경제과는 환경기술경제과로, 녹색협력과는 환경협력과로 바뀌었다. 녹색 자리에 환경이 들어간 건데, 이는 이명박 정부 이전 이름으로 돌아간 것이다. 다른 곳도 녹색이 탈색됐다. 지식경제부 녹색성장기후변화정책과는 업무를 다른 2개 과에 이관하고 없어졌다.

이렇게 이름을 바꾼 건 사필귀정(事必歸正)과 정명(正名)이란 측면에서 긍정적이다. 이명박 정부는 처음부터 녹색을 부르짖었다. 2008년 8·15 경축사에서 저탄소 녹색성장을 새 국가발전 패러다임으로 제시했다. 한반도 대운하로 시작해 4대강 사업으로 이름을 바꾼 초대형 토목공사도 강 살리기와 녹색성장이란 명분으로 분식됐다. 환경 파괴와 생태계 교란이 분명한, 누가 봐도 회색성장인 사업을 끝끝내 녹색이라고 우겼다. 뻔뻔스러운 비논리는 원전이 청정 녹색에너지란 궤변으로 이어진다. 그런 숱한 녹색타령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온실가스 배출량은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정도면 사기극 수준이다.

 

 

550억원을 들여 겨우 조성한 자연둔치가 4대강 사업으로 다시 파헤쳐졌다. 부산시는 2002년부터 4년간 무진 애를 써서 부산 사상구 삼락동 낙동강 둔치를 복원했다(2010년 4월17일).

 

하지만 4대강 사업이 시작되자 다시 파헤쳐져 수변습지 50%가 사라졌다. ‘함안~부산 구간에서 강폭을 500m 확보해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2011년 3월23일). 사진 김세구 기자/ 이명박은 이런 공사를 저탄소 녹색성장을 위한 노력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녹색 아닌 것을 녹색이라 부른다는 점에서, 이른바 정명의 문제를 건드리기도 한다. 공자는 명(名)에 부합한 실(實)이 있어야 그 명은 성립한다고 했다. 그래서 바르지 못한 이름, 부정명(不正名)을 매우 싫어했다. 그 점에서 이번 개명은 해당 부서에 제 이름을 찾아준 셈이다.

그럼에도 이 정명에 마냥 흔쾌한 마음은 아니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할 진짜 녹색 가치는 따로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름에서 녹색을 뺀다는 걸 녹색 추구 포기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반대로 제대로 추구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환경문제에 대한 새 정부의 방향은 뚜렷한 게 보이지 않는다. 성장론자들을 중용해 기후변화 적극 대처 같은 공약은 수사에 그치지 않느냐는 의구심도 든다. 이명박 정부의 원전 확대 정책을 계승할 것이란 관측도 있다. 이 정부가 입만 열면 강조하는 대통령 국정철학의 실체가 뭔지 모호하고, 장관 등 고위직 인선을 하는 걸 보면 거기서 거기 같다는 생각도 들고. 의문부호가 많다. 이러다 다음 정부에선 미래나 창조 같은 이름이 지워지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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