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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 받아쓰기

언어를 배우는 데 받아쓰기는 중요한 과정이다. 남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맞춤법을 정확히 지켜 옮겨적는 과정을 통해 문법과 어휘, 표현력 등을 익힌다. 집중력도 늘어난다. 그래서 초등학교 국어 교육엔 받아쓰기 수업이 있다. 매주 한두 차례 받아쓰기 시험도 본다. 영어공부도 딕테이션(dictation), 곧 받아쓰기는 필수적이다. 러시아어 교육에서도 이 나라말로 같은 뜻인 ‘직토프카’가 중시되는 건 물론이다.

청와대나 정부 부처의 여러 회의 장면을 보면서 가끔씩 고개를 드는 의문이 있다. 무엇을 열심히들 메모하는 모습 때문이다. 엊그제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정책 점검회의에서도 참석자들이 일제히 뭔가 적고 있는 사진이 경향신문에 크게 실렸다. 저 진지한 얼굴로 적고 있는 게 뭘까. 대통령이 말하는 것을 받아적는 걸까. 내용은 뭘까, 못내 궁금한 것이다. 그러면서 연상되는 것이 초등학교의 받아쓰기 시험이다.

 

 

2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경제정책 점검회의 참석자들이 경기부양책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누며 메모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궁금증의 일단이 풀렸다. 한 보도에 따르면 지난 18일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10여가지 사안에 대해 지시한 내용을 요약한 것만 자그마치 200자 원고지 35장, 7000자가 넘었다고 한다. 대통령이 “첫째, 둘째” 하며 원자력의 안전관리체제에 대해 조목조목 언급한 현안들을 적다 보니 그랬다는 거다. 그렇다면 영락없는 받아쓰기 풍경이다.

정부 부처나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 문화가 이렇다는 건 문제가 있다. 대통령이 말하고 참석자들이 받아적는 ‘딕테이션 회의’에서 치열한 토론과 원활한 소통이 이뤄지는 걸 기대할 수 있을까. 다수의 지혜도, 창의력도 발현되기 어렵다. 소위 ‘토’를 달고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 눈치보이는 분위기가 검증부실로 인한 잇단 인사파행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라 본다.

며칠 전 허태열 청와대 비서실장이 자신이 주재한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지시하는 것을) 받아쓰기만 하고 자기 분야 일만 하는 게 정무 비서가 아니다”라고 수석비서관들을 다그쳤다고 한다. 대통령에게 건의할 내용이 있으면 건의도 하고, 정책화할 내용도 말하고, 민심이 어떠하다는 내용도 전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비서실장의 주문이 청와대와 정부 회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좋겠다. 그러려면 허 실장부터 솔선해야 한다. 안 그러면 “너나 잘하세요” 소리나 듣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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