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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 밀봉과 소통

러시아 혁명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열차가 나온다. 바로 ‘밀봉 열차’다. 레닌은 망명지 스위스에서 밀봉 열차를 타고 독일, 스웨덴을 거쳐 1917년 4월3일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한다. 이 열차는 1차 세계대전의 적국 독일이 내준 것이었다. 독일은 레닌이 귀국하면 대독전 중단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았지만, 한편으론 레닌 일행이 독일에 사회주의를 전파할 것이 두려워 특수제작한 봉인 열차를 제공했다고 한다. 레닌은 이 열차 안에서 볼셰비키당의 기본적 전술을 작성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4월 테제’다.

그러고보면 이 밀봉 열차는 귀국길의 레닌이 급진적 혁명의지를 굳게 다지며 생각을 가다듬는 유용한 공간이 되었음직하다. 레닌은 3주간의 노선투쟁 끝에 ‘4월 테제’를 채택시켰고, 그해 10월혁명에 성공한다.

 

 

                                밀봉열차를 타고 1917년 4월3일 페트로그라드(현 페테르부르크) 

                                 핀란드역에 도착한 레닌이 수많은 군중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우리 정치판에서도 요즘 밀봉이란 말이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한데 쓰임새는 사뭇 다르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인수위가 비밀리에 사람을 뽑는 방식을 두고 회자되는 게 밀봉 인사, 밀봉 4인방 같은 표현이다. 인수위의 지나친 비밀주의를 비판하는 야당뿐 아니라 인수위 스스로도 그런 인식을 드러낸다. 가령 지난달 27일 윤창중 당선인 수석대변인은 인수위원장 등을 발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밀봉해 온 것이기 때문에 저도 이 자리에서 (뜯어 보고) 발표를 드린 겁니다.” 나머지 인수위원 발표 시점을 묻는 질문엔 “그거도 밀봉해 주시면 발표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수석대변인만의 문제가 아닌 듯하다. 박 당선인은 어제 “대변인을 통한 공식 발표 외에 설익고 아이디어 차원의 이야기가 언론에 보도되지 않게 각별히 신경써 달라”고 했다. 국민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전날 김용준 인수위원장은 보안이 준수되지 않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응분의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는 말도 했다.

인수위가 이렇게 ‘밀봉 모드’로 가는 분위기는 심히 유감이다. 물론 언론의 추측, 중구난방식 보도는 문제다. 그러나 그게 발표하는 것만 쓰라는 논리를 정당화하는 건 절대 아니다. 두말할 것 없이 밀봉과 소통은 상극적 개념이다. 밀봉은 불통을 낳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 정권에 진저리를 치는 이유가 그 불통성 탓이었다. 박근혜 인수위도 그런 조짐이 있다. ‘불통의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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