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가끔씩 경기·충남 서해안으로 바람을 쐬러 간다. 새로운 곳에 갈 때마다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는데, 바로 지명이다. 가령 충남 안면도 꽃지해수욕장을 지나간다. 흥미를 끄는 것은 예외없이 한자 일색인 무슨 읍 무슨 리 다음에 나오는 마을 지명들이다. 기기묘묘한 순우리말 이름들이 넘쳐난다. 뛰밭머리, 큰바탕, 서륙개, 산내골, 그물목, 되네기, 빼미…. 이런 이름들이 언제 어떻게 지어졌으며, 어떤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는지 자못 궁금해진다. 이건 이곳뿐 아니라 전국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다.
향토색 짙은 민족문학을 추구한 작가 김정한 선생(1908~1996)은 생전에 우리말 구사에 대한 엄격한 신조로 유명했다. 한 번은 제자 최영철 시인을 이런 말로 꾸짖었다고 한다. “세상에 이름 없는 꽃이 어디 있노. 시인이라면 낱낱이 찾아서 붙여줘야지.” 선생이 보기에 ‘이름 모를 새’나 심지어 ‘이름 없는 꽃’이라고 쓰는 것은 게으름 탓이었다. 다 자기 이름이 있건만 명색 문인이 꽃이름 풀이름도 잘 모르고 얼버무려서야 되겠느냐는 생각이었다.
전남 완도군 금당면의 이름없는 무인도. 무인도의 상당수는 이름 없는 섬, 무명도이기도 하다.
전라남도가 엊그제 이름 없는 무인도에 이름을 붙여주는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다도해에 옹기종기 떠 있는 ‘이름 없는 섬’들이 이름을 갖게 되었다. ‘가스마리도’ ‘무녀도’ ‘넋섬’ ‘살피도’ ‘거멍바위섬’ 등 이름들도 참 곱다. ‘가스마리도’는 섬 꼭대기 옹달샘이 가슴앓이 병에 효험이 있다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내년까지 이름이 아예 없던 무인도 461곳에 작명이 이뤄진다. 작명엔 지역의 사연, 섬의 모습, 주변 특성 등이 고려될 것이라고 한다.
전남엔 전국 3409개 섬 중 65.1%인 2219개가 있다. 이 중 유인도는 280개뿐이니, 나머지 87%는 무인도이고 이 가운데 상당수는 이름마저 없었던 거다. 그렇다면 태곳적부터 무명도(無名島)로 남아있었던 섬들이 비로소 이름을 갖게 되는 만큼 좋은 이름을 찾아 붙여줘야 한다. 두고두고 이어질 섬 이름에도 정명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무인도는 때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원천이 된다. 그래서 <로빈슨 크루소> 같은 소설의 무대도 되고, 범인들도 한번쯤 무인도에 표착하는 꿈을 꿔보게 한다. 이런저런 일로 세상이 싫어질 때 그렇다. 또는 자기성찰이 필요할 때도 도움이 될 거다. 오늘 문득, 그 섬으로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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