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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 미래부

조지 오웰이 1949년 쓴 소설 <1984>의 무대 오세아니아엔 정부부처가 네 개 있다. 역설적이게도 내건 이름과 하는 일이 백팔십도 다르다. 전쟁을 관장하는 부는 평화부(Ministry of Peace)이고, 사상범죄 처벌 등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부는 애정부(Ministry of Love)다. 경제문제를 책임지는 부엔 풍요부(Ministry of Plenty)란 이름이 붙었지만 실제론 매일 배급량 감소만 발표한다. 보도·연예·교육·예술을 관장한다는 진리부(Ministry of Truth)는 주요 업무가 모든 정보를 통제, 조작하는 일이다.

주인공 윈스턴이 근무하는 진리부의 거대한 벽엔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란 당의 슬로건이 붙어 있다. 이 구호는 ‘빅 브러더’의 얼굴과 함께 25센트짜리 동전에도 새겨져 있다. 다른 구호도 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이 논리에 따라 과거는 거침없이 개조된다. 이렇게 과거를 ‘재창조’한 다음엔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잊어야 한다. 눈여겨볼 대목은 당이 ‘이중사고(doublethink)’와 ‘신어(Newspeak)’ 강요를 통해 이를 관철한다는 것이다.

 

 

        김용준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이 15일 서울 삼청동 인수위원회에서 정부조직개편안을 발표하고 있다.



소설 <1984>가 생각난 건 엊그제 정부조직 개편안 발표를 접하면서다. 특히 신설된 미래창조과학부란 것이 이 소설을 연상시킨다. 개편의 핵심으로 지목되는 이 부처를 줄여서 미래부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그 이름이 풍기는 분위기가 <1984>의 진리부, 애정부 따위와 묘하게 닮았다.

이 부는 정체가 아직 분명하지 않다. 하긴 미래창조과학이란 말 자체가 모호하긴 하다. 지금까지 나온 설명은 이 정도다. 국민행복시대를 열기 위한 경제부흥을 목표로 신설했다. 신성장동력 발굴과 일자리 창출이란 박근혜 당선인의 ‘창조경제’를 주도할 부서다. 따라서 규모와 권한, 예산 면에서 이전 과학기술부보다 월등하게 강해질 것 같다. 과거 과기부와 정보통신부를 합친 규모에다 행정안전부와 지식경제부의 일부 기능까지 이관받기 때문에 공룡화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사실 신생, 미지의 부라고 해도 자기 역할만 제대로 한다면 이름 갖고 시비를 걸 일은 아닐 거다. 행여 <1984>의 부처들이 그랬던 것처럼 ‘빅 브러더’의 감시 속에 거침없이 과거사를 재창조하는 것 따위의 엉뚱한 짓이나 벌이는 일은 없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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