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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 검증의 검증

스포츠에서 선수와 심판이 자기 역할을 혼동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축구를 하던 선수가 주심으로 돌변해 파울 호각을 불어댄다면. 경기 진행이 엉망이 되는 것 정도가 아니라 게임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선수는 열심히 뛰고, 심판은 공정하게 판정을 하면 된다. 그게 이 바닥의 룰이다.

뜬금없이 선수와 심판 얘기를 꺼낸 것은 요즘 감사원의 4대강 사업 감사를 두고 선수와 심판을 혼동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서다. 감사원이 4대강 사업이 전반적으로 부실했다고 발표하자 엊그제 임종룡 국무총리실장이 “총리실이 중심이 되어 다시 한번 철저한 검증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정부가 감사원의 감사 결과를 믿을 수 없다며 민간을 통해 재검증하겠다고 밝히고 나선 것이나 진배없다.

문제의 초점은 감사원 감사를 재검증하겠다는 발상이다. 우선 형식논리적으로 황당한 얘기다. 감사원은 행정기관과 공무원의 직무에 대한 감찰을 목적으로 설립된 대통령 직속의 국가 최고 감사기관이다. 헌법과 감사원법에 그렇게 돼 있다. 이 점에서 감사원이 부실하다고 판정한 결과를 자신이 재검증하겠다는 것은 선수가 심판까지 맡겠다고 나서는 격이다. 자기 죄를 자기가 재판하겠다는 식의 당돌한 생각이라고 할 수도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한국-이탈리아 16강전에서 모레노 주심이 토티에게 시뮬레이션 반칙을 적용해 퇴장을 선언하고 있다. 이 판정에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했지만, 정부가 감사원 4대강 감사를 재검증하겠다는 건 선수가 심판까지 맡겠다는 발상이란 지적이 나오고 있다.

 

                                                        명장면으로 남은 모레노

                                                        주심의 '무표정 레드카드'

이번 4대강 사업 감사 재검증론은 지난 대선 때 만발했던 후보들에 대한 검증론의 여파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때 검증, 검증 하던 것이 버릇이 돼 감사원 감사 결과까지 검증하자는 건가. 그럼 감사원이 한 건 뭔가. 김황식 총리가 말한 ‘객관적 검증’은 또 뭔가. 질문은 이어진다. 검증은 검증을 낳는가. 어떤 검증이 진짜 검증인지 아닌지 가려내기 위해 다시 검증을 해야 한다면, 그 끝은 어딘가. 이 대목에서 예수의 가계를 밝히기 위해 ‘누가 누구를 낳고’가 42차례나 반복되는 신약성서 첫장이 생각난다.

양건 감사원장은 이날 국회에서 “감사원 감사 후에 정부가 사후 검증한 사례가 있느냐”는 질문에 “그런 사례를 들은 바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전례없는 재검증을 들고 나온 것은 그만큼 이명박 정권이 명운을 걸고 집착한 사업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독선의 끝은 결국 이런 식의 ‘4대강 코미디’인가 보다. 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이 “피눈물이 난다”고 했을 만큼 너무나 비극적인.

입력 : 2013-01-24 21: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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