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사람에게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속담이다. 중국에도 ‘기러기는 날아가면 울음소리를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좋은 명성을 남긴다’란 말이 있다. 아무렴 태어나 입신양명(立身揚名), 곧 사회적으로 출세하여 세상에 이름 드날리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이런 세상에선 이름 석자를 세상에 알리는 도구인 명찰, 이름표도 중요하다. 명찰은 때로 자부심의 이유가 되기도 하는데 특히 제복 문화에 그런 경우가 많다. 가령 빨간명찰은 해병대의 상징이다. 그래서 해병대원들에겐 빨간명찰을 뺏기는 것을 굉장한 치욕으로 여기는 정서가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연전에 해병 모 부대에서는 후임병을 구타한 가해병사가 빨간명찰을 회수당한 일이 있었다. 당사자가 커다란 불명예로 받아들였음 직하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울산공장의 한 자동차 생산라인에서 도어를 조립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장기화하고 있는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문제에서도 심심치 않게 ‘명찰’이 등장한다. 현대차 울산공장 사내하청 비정규직인 황모씨(37)는 어제 경향신문에 이렇게 토로했다. “같은 일을 하면서 정규직은 가로명찰을, 비정규직은 세로명찰을 단다. 위화감을 느낀 비정규직들은 사내 출입 때 명찰을 경비원에게 잠깐 보여줄 뿐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급여 등 차별보다 더욱 참지 못하는 것은 인간적 모멸감을 느낄 때라고도 했다. 자부심의 상징인 해병대 빨간명찰과는 반대로 현대차의 세로명찰은 감추고 싶을 뿐인 물건이다.
세로명찰은 현대차 비정규직 문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 존재로 떠오른 듯하다. 지난해 10월부터 100일 넘도록 철탑 농성 중인 사내하청 노동자 최병승씨는 최근 회사가 인사발령을 내자 “조합원들과 함께 정규직 명찰을 달고 출근하겠다”며 거부의 뜻을 밝혔다. 2010년 11월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요구하다 분신을 기도한 황모 조합원은 병상에서 노동자들에게 “꼭 다 나아서 정규직 명찰을 달고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회사 측은 2000년대 초부터 이런 식의 명찰제도를 써왔다고 한다. 정규직과 ‘외부인력’을 쉽게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관리상의 편리가 중요했지 노동자들의 심리적 부담은 별 고려사항이 아니었을 거다. 여기에 현대차 비정규직 문제의 본질이 상당부분 녹아 있지 않나 한다.
입력 : 2013-01-28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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