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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 용산 '사건'

작년 가을 우리 동부전선에서 터진 깜짝 놀랄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북한 병사가 3중철책을 넘어 최전방 소초 문을 두드려 탈북의사를 밝힌 사건이다. 충격적인 이 사건은 ‘노크 탈북’으로 세간에 알려져 있으나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경향신문도 10월11일자 1보에선 ‘북한군 병사가 내무반 문 두드릴 때까지도 몰랐다’고만 보도했다. 사건이 ‘노크 탈북’으로 회자된 건 그 며칠 후부터다. 누가 처음 붙인 건지는 모르나 ‘노크 탈북’은 사건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썩 잘 지은 사건명 같다. 군에야 두고두고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남겠지만.

언론은 크고 작은 사건들을 압축적으로 요약·정의하는 표현을 쓰곤 한다. 그게 빠르고 생생한 뉴스를 전해야 하는, 사건을 먹고사는 저널리즘의 생리다. 그러다 보니 특정 사건에 적절한 작명을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 된다.

KBS가 지난 29일 9시뉴스에서 대통령의 특사 소식을 전하며 “용산사건과 관련해 수감된 철거민 5명도 특별 사면됐다”고 보도했다. 모든 언론이 써 온 ‘용산참사’ 대신 특이하게 ‘용산사건’이란 표현을 쓴 것이다. 이는 보도국 간부들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참사’란 표현이 당시 경찰의 강제 해산에 부정적인 뜻을 담고 있으므로, 객관적·중립적 표현을 사용하자는 취지라는 것이다.

 

 

2009년 1월 20일 서울 용산구 남일당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해 점거농성을 벌이던 철거민 5명과 경찰관 1명이 숨졌다. 화재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나, 위험한 상황에서 경찰이 무리한 진압작전을 편 것이 '참사'를 불렀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KBS가 중립적 표현을 쓴다며 용산참사를 뒤늦게 용산사건으로 바꿔 부르는 것은 진실을 호도하는 것이란 지적이 나오고 있다.



사건·사고들을 중립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사건 이름부터 손질한다는 발상 자체는 나무랄 데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를 천편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문제다. 바로 사건명이 사건의 본질과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용산참사는 발생 직후부터 참사로 불렸다는 점에서 ‘노크 탈북’과는 또 다르다. 사건 당일인 2009년 1월20일부터 연합뉴스는 ‘용산참사’란 말을 썼고, 대다수 매체들도 그랬다. 또 경찰의 무리한 진압이 참사의 중대 원인이었다는 점에 대해선 이견이 적다. 거기다 만 4년 동안 써오던 말에 뒤늦게 중립성 문제를 제기한다는 게 여간 생뚱맞지 않다.

조금 확장하면 이 문제는 역사기술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5·16은 무슨 정치적 중립 여부를 떠나 분명한 쿠데타다. 우파가 권력을 쥐었다고 그게 혁명으로 둔갑할 순 없다. 이와 반대로 광주 ‘사태’가 훗날 민주화운동이나 항쟁으로 불리게 된 건 정당한 복권이자 정명(正名)이었다. 이 점 헷갈리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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