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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웅 칼럼

유쾌한 ‘예측불허’는 없을까

별명이 ‘이리가리’인 선배가 있었다. 생각이 종잡을 수 없이 왔다갔다 한다고 해서 후배들이 붙인 거였는데, 흉보다는 애칭 성격이 강했다. 이리가리는 ‘이레귤러(불규칙적)’의 일본식 발음이다. 옛날엔 TV 야구 중계에서 타구가 야수 앞에서 불규칙적으로 튀어오르면 ‘이리가리 바운드가 났네요’란 웃지 못할 해설이 나오곤 했다. 그가 그런 별명을 얻은 것은 가령 평소엔 극우적 태도이다가 갑자기 급진으로 돌변하는 식의 예측불허 성향 때문이었던 것 같다.

장삼이사들이 ‘이리가리’인 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정치인이 이런다면 문제가 크다. 대표적인 인물로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이 떠오른다. 참 극단적인 예측불허의 정치인, 대통령이었다. 1991년 보수파 쿠데타 때 의사당을 봉쇄한 탱크 위에 올라가 연설한 것이나, 이태 후 의회 장악을 위해 의사당 건물에 무차별 포격을 가한 것도 예측불허의 행동이었다. 걸핏하면 각료 전원 해임 같은 깜짝쇼로 정치생명 연장을 꾀했다. 술은 예측불허에 날개를 달았다. 독일 방문 때는 군악대 지휘봉을 빼앗아 휘둘렀고, 아일랜드 공항에선 비행기에서 못 내리는 바람에 정상회담을 못했다.

 

이런 옐친과 잘 대비된 인물이 그의 밑에서 5년간 총리를 지낸 빅토르 체르노미르딘이었다. 서방 언론은 그를 말할 때 ‘예측 가능한(predictable)’이란 표현을 즐겨 썼다. 옐친이 워낙 예측불허였기에 상대적으로 더 그랬다. 예측 가능성이란 측면에서 두 사람을 비교하면 예측불허의 정치인 옐친은 큰 문제고, 반면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가는’ 체질인 체르노미르딘의 예측 가능성은 훌륭한 미덕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정치에서는 모든 것이 이렇게 선명하게 구분되는 게 아니다. 정치는 흔히 생각하듯 예술과 상극관계가 아니다. 나는 정치적인 것도 예술적일 수 있다는 가설 아래 생각을 펼쳐 보고자 한다.

 

 

 

체르노미르딘 러시아 초대 총리(위). 예측 불허의 옐친 대통령 밑에서 '예측 가능한' 정치인으로 5년 이상 총리직을 수행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체르노미르딘과는 또다른 의미에서 예측 가능한 정치인인 듯 하다.

 

 

정치가 예술이란 가설에 따르면 천편일률, 스테레오타입은 바람직한 정치의 적이다. 정치의 ‘예술성’을 위해서는 주제를 뒷받침하는 다양한 변주와 파격도 좀 있어줘야 한다. 완벽한 예측 가능성이란 것은 정치인이나 관찰자 모두에게 불가능하다. 도리어 어느 정도 예측불허적 성격이 남아 있는 게 정치인에게는 매력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은 의표를 찌른 예측불허의 행동이었을까. 일견 그런 것 같다.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에 통쾌하게 한 방 먹인 듯도 하다. 그런데 그 후 전개 상황은 전혀 후련하지 못하다. 일본은 울고 싶던 차에 뺨을 때려주었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급기야 위안부를 일본군이 강제 연행했다는 것을 인정한 고노 담화까지 부정하려 한다. 일본의 반응이 턱없이 치졸한 것은 별론으로 하고, 이 대통령이 ‘잘 있는’ 독도를 갖고 평지풍파를 일으킨 것만은 분명하다.

문제는 이 대통령의 돌출행동이 보여준 예측 불가능성이 실상은 상대방이 얼마든지 예측할 수 있는 행위란 점에서 꼼수 수준이었다는 사실이다. 꼼수란 쩨쩨한 수단이란 뜻이다.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가 “이 대통령이 정치적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독도 방문을 강행했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듯 상대방이 훤히 읽을 수 있는 수는 수가 아니다. 옐친이 즐겨 쓰던 국면전환용 깜짝쇼의 한국적 버전이었다고 할까.

장준하 선생의 유골에서 타살 흔적이 나오자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말한다. “나도 깜짝 놀랐다. 재조사를 해 봐야 할 것 같다.” 물론 이건 상상이다. 박 후보에게서 그런 소망스러운, 즉 예측불허의 반응은 결코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는 “(참여정부 당시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에서 현장, 목격자에 대한 조사가 그동안 이뤄지지 않았나”라는 모범답안을 내놨다. 필자도 그에게서 그 이상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늘이 두 쪽 나도 그가 생물학적 아버지와의 천륜을 끊을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게 너무나도 예측 가능하기 때문이다.

김어준은 책 <닥치고 정치>에서 박근혜의 정신세계를 정리한 적이 있다. “그 사람들(친박연대) 모아놓고 박근혜의 철학이 뭔지 구체적으로 쓰라고 시험 쳐봐. 전원이 한 페이지도 못 넘긴다. 쓸 게 없어. 국민과의 약속은 지켜야 하며, 국가는 번영해야 하고, 외세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야 한다. 딱 세 줄 쓰면 끝이야.” 사람들은 박근혜를 긴 세월 알고 살아왔지만 그가 정작 어떤 정치인인지는 아는 게 없다. 인지도가 사실상 100%인 현역 정치인이 이렇다는 건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의 정치철학이나 논리는 상당 부분 미지의 영역이다. 이건 달리 말하면 정답이 항상 나와 있다는 뜻과 통한다.

새누리당 경선 슬로건이 “박근혜가 바뀌네. 박근혜가 바꾸네”였다며 달라졌고, 달라지고 있다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어불성설이다. 천편일률, 새로운 게 새로울 게 없는 정치인, 그런 지도자를 둔 국민은 불행하다. 모름지기 지도자는 웅숭깊음이 있어야 한다. 내기를 한다면 그가 앞으로도 쭉 예측 가능한 정치인으로 남을 것이라는 데 걸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