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 가면 인간이 철저히 상황 속의 존재란 사실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평소 관념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게 온몸으로 느껴진다고 할까. 예를 들어 보겠다. 외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그 순간부터 승객들은 퍼스트 클래스와 비즈니스 클래스, 이코노미 클래스로 가차없이 분류된다. 마치 삶이 처절한 ‘계급투쟁’의 현장임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필자의 동료는 언젠가 미국에서 이코노미에서 퍼스트 클래스로 업그레이드되는 뜻밖의 호사를 누렸는데, 그 월등한 안락함에 감동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고 한다.
이건 외국여행에 대한 우스갯소리지만, 필자는 최근 러시아를 방문해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상황인식이 명료해지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모스크바 북쪽 인구 25만인 고도 벨리키 노브고로드의 7월은 밤 11시에도 아직 훤했다. 배드민턴을 치거나 개와 산책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자문했다. 이곳 사람들의 삶은 나아지고 있는가. 옛날보다 더 살 만한 곳이 되었나. 경제, 사회, 그리고 정치적으로…? 아직 소련이 무너지기 전인 1991년부터 러시아를 찾아온 터였기에 그게 알고 싶었다.
며칠 뒤 이른 아침 페테르부르크의 샤슐릭(양 꼬치구이) 고기 판매점 앞 거리에서는 파 등 채소류를 파는 여인들을 보며 궁금해졌다. 저 장사를 해서 하루 얼마를 벌까. 동시에 찰나적으로 우리의 삶과 비교하고 평가하게 된다. 가게 안에서도 채소를 파는데, 우리 같았으면 장사 방해된다며 노점을 쫓아버렸을 텐데.
러시아 제 2도시 페테르부르크 거리 풍경
이 칼럼은 러시아 기행문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과 이타르타스통신이 공동 주최한 한·러 언론교류 프로그램에 따라 4~14일 모스크바, 벨리키 노브고로드, 페테르부르크 등 3개 도시를 방문했다. 필자는 칼럼 제목을 ‘내가 사랑한 러시아’로 정했다. 이건 원래 이재혁 부산외국어대 교수가 신문기자 시절 낸 러시아 체험기의 제목(러시아어로는 ‘라시야, 카토루유 야 류빌’)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스크바 특파원을 지낸 필자의 어쩌면 기자 생활 중 마지막이 될 러시아 방문기에도 어울리는 제목인 것 같다.
모스크바에서는 ‘세계미디어정상회의(미디어 서밋)’란 것이 열렸다. 103개 나라 213개 언론매체를 대표하는 언론인 300여명이 참석했다. 주제는 ‘세계 미디어, 21세기의 도전’으로 참가자들은 주로 전통미디어와 뉴미디어의 갈등과 공존 문제에 관심을 보였지만 필자는 처음엔 이 미디어 서밋이란 것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러시아의 언론 자유 수준이 세계 197개국 가운데 172번째란 프리덤하우스 조사가 얼마 전 있었고 지난 3월 대선도 푸틴 후보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보도로 치러졌음을 알고 있었기에 뜬금없는 물타기성 행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밋에 참가하면서 그것도 부분적 진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토론장에선 정부 비판 기사를 쓰다 2006년 살해된 안나 폴리트콥스카야 노바야 가제타 기자 등의 이름이 자주 거명됐다.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언론 자유를 확대하는 방안도 집중 토론됐다.
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난 보리스 페트로프 이타르타스 지사장은 국영통신인 자사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토로했다. “우리는 의견보다는 사실보도를 중시하되, 러시아 정부의 입장을 거스르는 기사는 쓰지 않는다. 이곳 프레스 룸도 반정부·반푸틴 인사에게는 개방하지 않는다.” 보수·진보 등 다양한 매체들이 자유롭게 논조를 펼 수 있으나 국영통신이 가야 할 길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통역을 맡은 서정희씨(페테르부르크대 박사과정)는 정부가 이 지역 노바야 가제타 책임자를 바꾸려다 큰 저항에 부딪혀 포기한 적도 있다고 귀띔했다.
나는 이번 방문에서 러시아가 많이 변했느냐는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다. 12년 만에 러시아에 왔다고 하면 그렇게들 물었다. 러시아인들은 술자리에서 돌아가며 몇 분짜리 건배사를 하곤 한다. 나는 어느 저녁 식사자리에서 이런 취지의 보드카 건배사를 했다. “새 건물들이 들어서는 등 겉으론 많이 변했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정신과 영혼이다. 이건 내 희망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모스크바에서 만난 친구 지마는 이에 절반만 동의한다고 했다.
시인 튜체프는 러시아란 나라에 대해 이런 짧은 4행시를 썼다.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라시유 우몸 넬자 파냐치)/ 상식의 잣대로 잴 수 없다. /그것은 특별한 형상이 있으니까/ 러시아는 오직 가슴으로 믿어야 한다.” 러시아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란 유명한 시다. 왜 아니겠는가. 푸틴과 메드베데프가 총리·대통령 자리를 맞바꾼 것부터가 그렇다. 한 나라를 신비주의적으로 접근하는 건 절대 권장할 일이 아니지만, 이번 여행에서도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시를 읊조리고 있었다.
물론 우리는 언론 등 다양한 접촉을 통해 러시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다. 푸틴 대통령은 올해 세 번째로 대통령이 된 후 정부에 극동발전부를 신설했다. 굳이 남과 북을 구분할 건 아니지만 러시아는 남한 쪽과의 협력에 훨씬 더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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