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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웅 칼럼

진보도 껍데기는 가라

통합진보당 사태를 계기로 내가 진보 편에 서 있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 만약 착취, 부패, 억압, 불의가 없는 세상이라면 내겐 낭만적 보수성향이 맞았을 거다. 지킬 것이 많은 사회라면 나는 보수적인 사람이 됐을 거다. 현재에 만족 못하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지 않아도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전속력으로 후진하는 나라에서 진보에 회의도 들지만 진보를 버릴 수 없는 이유는 이 현재가 너무나 엉망이어서 미래에서 희망을 찾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지금도 진보 편이다.


 

그 필연적 결과로 요즘 문자로 멘털 붕괴, 멘붕 상태를 겪고 있다. 자신을 진보라고 생각하는 상당수가 비슷한 증세이리라. 왜 아니겠는가. 진보에게 이토록 호된 배신감을 느낀 것은 난생처음 있는 일이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이 한·미 FTA 협상을 하고 이라크 파병을 했을 때 크게 실망했지만, 그건 진보에 대한 배신감과는 달랐다. 좌파 신자유주의자를 자처한 그가 개혁적 보수 또는 중도 정치인의 한계를 넘지 못했음을 알았던 것이다. 그러니 더욱 억장이 무너진다. 총선에서 야권이 패한 것도 모자라 진보세력에게서 마각이 드러난 것이다. 통진당 당권파가 진보도 민주주의도 깡그리 무시한 ‘자폭테러’를 저질렀음이다. 저들의 잘못은 분명하다. 다른 당도 아닌 진보정당에서 당권·기득권·금배지에 매달려 부정한 선거를 저지르고 폭력을 행사한 죄는 진보진영으로부터 파문받아 마땅하다.

 

 

사죄의 큰절 통합진보당 강기갑 비상대책위원장이 14일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기에 앞서 당 폭력 사태와 관련, 사죄의 큰절을 올리고 있다. | 서성일 기자

 



시인 이상은 1936년 동인지 ‘시와 소설’에 “현대인은 절망하라. 절망은 기교를 낳고, 기교 때문에 절망한다”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거니와 혹독한 멘붕 상태인 필자의 머릿속엔 자꾸 몇 개의 시 구절이 맴돌고 있다. 그것은 ‘찬란한 슬픔의 봄’ ‘희망의 정수박이’ 그리고 ‘껍데기는 가라’다. 이 어지러운 판국에 뜬금없이 웬 시냐 할지도 모르나 시에서나마 위로를 찾고 싶은 심정이다.

이 처연한 봄날을 표현하는 데 김영랑이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노래한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의 “찬란한 슬픔의 봄”만큼 절절한 것이 있을까. 진보가 수구세력으로부터 색깔론 등 공격을 받는 것은 이젠 이력이 붙을 만큼 붙었다. 하지만 진보 내부에서 기득권을 놓고 치고박고 싸우는 듣도 보도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은 우리를 몹시 황망하게 만든다. 수구의 핍박은 전의를 북돋우는 측면도 있지만 이건 희망의 싹이 싹둑 잘려나간 기분이다.

그럼에도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건 역시 진보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만해 한용운은 요즘 기준으로 보면 대단히 진보·개혁적인 승려이자 저항시인이었다. 그의 대표작 ‘님의 침묵’은 이렇게 노래한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일제강점기라는 암흑의 시대를 살다간 그였지만 조국, 민족, 부처, 중생으로 해석되는 임을 향한 사랑과 희망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 1960년대 참여시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를 음미할 차례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시에서 ‘껍데기’는 가짜, 사이비, 위장, 얼치기와 비슷한 뜻이다. 그러나 시인이 굳이 껍데기란 단어를 쓴 건 ‘알맹이’란 말과 대비시키기 위함인 듯하다. 시는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고 요구함으로써 껍데기가 뭘 뜻하는지를 분명히 했다. 4·19혁명의 순수성만 남고, 동학혁명의 외침만 남고 모든 허위는 가라는 것이다. 신동엽에게 ‘껍데기’는 혁명정신을 훼손하려는 지배권력과 그들의 거짓, 위선, 불의, 민족의 발전을 가로막는 일체의 것이었다. 시의 행간에는 쿠데타로 인한 혁명의 좌절과 독재에 대한 분노가 녹아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시를 4월혁명의 좌절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선언으로 받아들인다.

정말이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이 시의 ‘껍데기’가 진보로 불리던 사람들을 겨냥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너무 순진했던 탓인가. 그러나 지금 나는 허접스러운 진영논리, 조직논리에 매몰돼 민주와 진보의 대의를 팔아넘긴 저들을 주저없이 진보의 껍데기로 규정하고자 한다. 저들의 기득권주의, 패권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진보의 대의에 대한 불같은 다짐과 결의만이 필요할 뿐이다. 필요한 진영논리가 있다면 그건 노동자 계급의 논리뿐이며 당파성 또한 그렇다. 진보에 대한 열정·희망을 놓으면 안된다. 이만한 일로 그게 꺾인다면 진짜 진보가 아니다. 세상은 넓고 진보가 할 일은 너무나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