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철웅 칼럼

삶이 무너지면 종북좌파가 된다

이 땅에서 종북주의자 되기는 식은 죽 먹기다. <개그콘서트>의 최효종식으로 말하면 “종북주의자가 되는 건 아주 쉬워요”다. 우선 삶이 무너지면 종북좌파가 된다. 무슨 얘긴가. 이건 주진우 ‘시사IN’ 기자가 취재 체험을 쓴 책 <정통시사활극 주기자>에 나오는 내용이다. “권리금도 없고, 단골도 사라지고, 가게 차리면서 얻은 빚도 갚을 수 없어지고, 신용불량자가 되고, 삶이 무너진다. 머리띠를 묶게 된다. 깡패들이 몰려온다. 그런데 경찰은 깡패 편이다. 언론에서는 법을 무시하는 데모꾼이라고 비난한다. 조금 지나면 ‘좌파’ ‘종북세력’ ‘빨갱이’라고 매도한다. 이들은 좌파가 무언지 종북이 무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랬다. 정부와 수구언론은 용산참사와 제주 강정마을 투쟁을 이념문제로 몰아 종북 색칠을 했다. 4대강 사업 반대에서도 한진중공업 사태에서도 그랬다.

 

2009년 1월 19일 서울시 용산 재개발 보상대책에 반발하던 철거민과 경찰이 대치하던 중 화재로 철거민 5명과 경찰관 1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정부와 수구언론은 도시빈민들의 투쟁에 끝없이 종북좌파 색깔을 입혔다. 그렇다. 이 땅에선 삶이 무너지면 종북좌파가 된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자본론>의 한 대목을 떠올렸다. 헨리 8세 때인 1530년 제정된 법에 따르면 ‘거지 면허’를 못 받은 건장한 사람이 부랑죄로 두 번 체포되면 귀를 절반 잘리고 노예가 된다. 세 번 체포된 사람은 가차없이 ‘반역자’로 사형당했다. 영국에선 1500~1550년 사이 7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15세기 말 이후의 피수탈자에 대한 피의 입법’ 장에 나오는 것으로, 토지를 수탈당해 무일푼이 된 농촌 주민들의 비참한 사회·경제적 처지를 보여준다.

또 있다. 천안함 사건의 정부 발표를 안 믿으면 종북주의자다. 이명박 대통령은 얼마 전 천안함 사건에 대해 “명확한 과학적 증거가 나왔음에도 북한은 자작극이라고 주장했다”며 “북한의 주장도 문제이지만 이들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는 우리 내부의 종북세력은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비약이 심하지만, 해석하자면 북한 소행이 확실한 천안함 폭침을 의심하는 사람은 종북주의자란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예수께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했듯 추호의 의심도 없이 그냥 믿어야 한다. 조용환 헌법재판관 후보자마냥 정부 발표에 대해 “신뢰한다”면서도 “보지 않았기 때문에 확신이라는 표현을 하는 건 적절치 않은 것 같다”는 식으로 토를 달면 안된다. 그러면 종북주의자가 된다.

박근혜 의원도 가세했다. 종북이란 말을 직접 쓰진 않았지만 더 묵직한 화두를 던졌다. 국가관이다. “기본적인 국가관이 의심받고 있는 사람은 국회의원이 될 수 없다”고 선고했다. 종북 논란이 일고 있는 통합진보당 두 의원은 의원직을 박탈당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 ‘의심스러운 국가관’이란 게 애매하다. 그걸 누가 정하나. ‘애정남’에 문의하기도 그렇고. 이현령비현령이 될 공산이 크다. 종북 되기 참 쉽다는 말이다.

‘종북’은 요즘 와서 전성시대를 구가하는 듯하지만 역사가 꽤 길다. 재작년 이맘때쯤 이른바 전향한 운동권 3명이 진짜 종북을 적출(摘出)하겠다며 <친북주의 연구>란 책을 썼다. 거기엔 “북한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종북주의는 단순한 친북과 구별하기 위해 1990년대 말부터 사회당이 사용하기 시작했다”며 더욱 심화된 친북주의로 볼 수 있다고 썼다. 따라서 종북은 친북의 발전된 형태, 즉 새 버전 정도로 볼 수 있는데, 이 친북의 역사는 면면하다. 해방이 되자 친일파들은 재빨리 반공주의자로 변신해 좌파·좌익, 빨갱이, 주사파 때려잡기에 나섰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서 1950년대 진보당을 이끈 죽산 조봉암은 이승만 정권에 의해 빨갱이 누명을 쓰고 처형됐다. 박정희 정권 때도 수많은 공안사건이 조작돼 민주인사들이 친북세력으로 몰려 투옥됐다.

이렇듯 이 시대에 종북좌파가 되는 건 아주 쉽다. 1994년 박홍 서강대 총장이 “주사파 5만명이 학계와 정당, 언론계, 종교계에서 암약하고 있다”고 ‘폭로’한 이래 그 증감폭은 잘 알 수 없되, 이 정권의 무차별적 종북 분류법에 따른다면 크게 늘어나지 않았나 한다. 이렇게 흔하디 흔한 종북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일까. 더 구체적으로 이석기·김재연 통진당 두 의원을 제명해 국회에 발을 못 들여놓게 해야 마땅한가.

의외의 인물에게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나왔다.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은 엊그제 “그 사람들이 종북으로 의심받으니 제명하자는 것은 신중히 하는 게 맞다”며 사상적 이유로 제명하는 데 반대한다고 했다. 그는 “정말 반국가적인 사상이나 활동을 해서 자유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했다거나, 할 가능성이 있다면 수사기관이 수사를 먼저 해야 할 일로 본다”고 말했다.

종북보다 무서운 건 따로 있다. 그것은 이분법적 색깔론이 횡행하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부정하는 나라다. 민주주의와 언론자유가 과거로 역주행하는, 극우적·광신적·반공적 폭력이 판치는 파시즘 사회다. 새누리당과 박근혜 의원은 민간인 불법사찰 문건을 통해 증거가 확실히 드러난 이 정권의 공영방송 장악 사실부터 제대로 보기 바란다. 이토록 오래 지속되는 공영방송 파행에는 철저히 외면하면서 때아닌 종북타령에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게 우스꽝스럽다.

'김철웅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사랑한 러시아  (0) 2012.07.17
티나와 결별하기  (1) 2012.06.27
진보도 껍데기는 가라  (0) 2012.05.15
어른들이 답해야 한다  (0) 2012.04.25
이명박과 박근혜의 정치적 DNA  (0) 2012.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