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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 ‘좌파적’ 올림픽 개막식

지난 주말 열린 런던올림픽 개막식 공연의 파격성이 화제다. 이런 유의 개막식에 관한 기존 틀을 여지없이 깨버렸기 때문이다. 가장 눈길을 끈 건 산업혁명을 소재로 삼은 점이다. 영국이 18세기 산업혁명의 발상지인 만큼 그 뿌리에 대한 자부심의 발로라 할 수도 있겠지만, 뜯어보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 병폐까지 함께 다룬 것이다. 산업혁명으로 자연이 파괴되고 노동자들이 비참한 삶에 빠진 상황을 묘사했다.

산업혁명을 상징하는 대형 굴뚝들이 연기를 뿜어낸다. 산업혁명과 도시화가 진행된 당시 런던에선 시커먼 굴뚝 속에서 청소를 마친 소년들이 꺼내달라고 비명을 지르곤 했다. 그러나 그 아래의 노동자들은 시뻘건 쇳물을 쏟아내는 용광로 작업에 지쳐 무심한 표정이다. 공연 2막의 제목을 ‘악마의 맷돌(Dark Satanic Mills)’로 붙인 것도 놀랍다. 이는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시 ‘밀턴’에서 쓴 표현으로, 훗날 경제학자 칼 폴라니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비판하기 위해 책 <거대한 전환>에서 “산업혁명이 인간을 통째로 갈아 파멸시킨다”는 뜻으로 사용함

으로써 더 유명해졌다.

 

 

 

 

'경이로운 영국(Isles of Wonder)'이라는 주제로 열린 개막식은 대니 보일 감독이 연출을 맡아 산업화의 진통에서 회복해 미래를 바라보는 농촌의 이야기를 담았다. 광부, 제철소 노동자, 직공, 기술자 차림을 한 연기자들이 산업혁명의 선구자인 영국이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던 시기를 형상화한 2막 공연을 펼치고 있다.


 

 

공연은 자본주의의 병폐를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국가 무상의료제도와 어린이 문학을 영국의 자랑거리로 제시했다. 전 국민에게 무차별·무료 보건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영국 의료제도는 자본주의 국가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공연 내용을 두고 집권 보수당의 한 의원은 “내가 본 것 중 가장 좌파적인 올림픽 개막식”이란 반응을 내놓았다고 한다.

이 ‘좌파적 개막식’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긍정적이다. 영화·문학평론가 강유정씨는 “향후 올림픽 개막식은 런던올림픽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란 분석을 내놓았다. 작가주의적 개막식, 시각예술에서 스토리텔링적 예술로의 교체가 그만큼 돋보였다는 것이다. 장이머우 감독이 연출한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이 국가·민족주의의 총화였다면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대니 보일 감독이 총지휘한 이번 런던올림픽 개막식은 상당히 인문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비용이 베이징(1000억원)의 절반도 안 들었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을 앞둔 우리로서는 타산지석으로 삼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 발상을 전환하고, 사고의 지평을 넓힌다면 못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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