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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 간서치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1960년대 노래 ‘I Am a Rock(나는 바위다)’ 가사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I have my books/ And my poetry to protect me(내겐 날 지켜줄 책이 있고 시가 있다).” 노래 속 ‘나’는 왜 이런 다짐을 하고 있을까. 바로 사랑 때문이다. “사랑 얘기는 하지 말라/ 전에 그런 단어를 들어봤지만/ 이젠 내 기억 속에 잠들어 있을 뿐.” 이 노래에서 책과 시는 힘겨운 사랑으로부터의 도피처 내지 방어막으로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달리 문자 그대로 간서치(看書癡), 즉 책만 보는 바보들이 있다. 책만 읽어서 세상물정에 어두운 사람이란 뜻으로, 가히 ‘역사적’이란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호가 난 간서치가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였다. 스스로 간서치를 자처했으며 <간서치전>이란 제목의 자서전을 썼다고 한다. 얼마나 간서치였냐 하면 그는 굶주렸을 때, 날씨가 추울 때,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 기침병을 앓을 때 책을 읽으면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잊을 수 있다고 했다. 가령 배고플 때 책을 낭독하면 배고픔을 못 느낀다거나, 기침할 때 소리 내 읽으면 기침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간서치(看書癡)를 자처한 이덕무<1741(영조 17)∼1793(정조 17)>의 필적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그러고 보면 노래 ‘I Am a Rock’과 간서치 이덕무 사이에 공통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즉 노래 속의 나가 사랑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책과 시를 찾았다면, 엄격한 신분사회인 조선에서 서얼이란 운명적 굴레를 쓴 이덕무가 마음을 둘 곳은 오로지 책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만 이덕무 등 실학파는 책 속에만 머물렀던 게 아니라 책을 통해 사회개혁을 꿈꾸었고 또 결국 그것을 실천했다는 데 의미를 둘 수 있다.

인터넷과 뉴미디어의 시대라 해서 종이책의 시대, 간서치의 신화가 다 어디로 사라져버린 건 아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도리어 이런 때일수록 인간에 대한 폭과 깊이를 더하는 인문학이 소중하며, 또한 고전의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가 그윽이 밴 사람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한양대학교가 9월부터 운영되는 기초융합교육원에 학사 출신인 표정훈, 이권우씨를 교수로 임용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지난해 별세한 출판평론가 최성일씨와 함께 대표적 서평전문가로 꼽히는 인물들이다. 현대판 간서치랄 수도 있는 이들이 대학 강단에 서게 됐다니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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