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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 그린스펀

지난 18년 동안 미국의 ‘경제 대통령’ 지위를 누려온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평소 완곡하게 돌려 말하기를 즐겼다. 따라서 1987년 8월 취임 직후 “내가 한 말의 의미가 분명하게 이해된다면 그것은 당신이 내 말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일종의 경고였다.
그린스펀 의장은 명언들을 자신의 어록에 추가해 나갔다. 90년대 후반 정보·기술(IT) 주식을 중심으로 한 주식시장 과열을 비판하면서는
‘비이성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이란 용어를 썼다. 엔론 등 대기업들이 잇달아 저지른 회계부정을 ‘전염성 탐욕(infectious greed)’으로 명명했다.




이런 정교한 말솜씨와 신중한 처신으로 레이건 이래 4명의 대통령을 거쳐온 그린스펀 의장이 31일 퇴임한다. 돌아보면 그의 영향력은 미국 경제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FRB 의장이 그만큼 막강한 자리인 데다 그의 긴 재임기간 동안 큰 사건들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린스펀 의장 취임 후 두달여 만에 주가가 하루에 22%나 폭락하는 ‘블랙 먼데이’가 찾아왔다. 그는 이를 금리인하, 달러방출 등 신속한 조치로 극복했다. 97~98년 한국 등 신흥시장 위기와 러시아의 채무불이행에도 적절히 대응했다. 2000년 IT 거품 붕괴와 2001년 9·11테러는 최대의 시련이었다. 그린스펀은 연 6.5%였던 금리를 1%까지 급격히 끌어내렸다. 이를 통해 소비를 살려 경제 회복을 꾀했다.

그에게는 정확한 분석과 처방으로 미국 경제를 안정적 성장 궤도에 올려놓았다는 평가가 있는 반면 비판도 만만치 않다. 그가 재임 중 이룬 것이
‘빚더미 위에 세워진 번영’이란 지적이 그것이다.
미국의 가계부채는 11조4천억달러로 사상 최고치였다. 무역적자도 7천억달러를 넘어 최고기록을 깰 것 같다. 초저금리 여파로 부동산 거품이 일고 있다. 그린스펀이 자유시장의 이름으로 중산층과 서민들에게 엉터리 처방으로 ‘사기’를 쳤고 세계경제는 더욱 심한 소득불균형에 빠졌다는 지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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