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는 게 아니다. 그런데 ‘봉숭아학당’에서 그걸 하겠다고 한다. 이런저런 곤경에 처한 한나라당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는 건 기적 같은 일이다. 그 기적을 이루겠다는 몇 갈래의 움직임이 한나라당에 있다.
첫번째는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의 ‘뼛속까지 쇄신론’이다. 그는 재창당을 뛰어넘는 쇄신을 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비대위원장을 맡기 직전 쇄신파들을 만나 “당의 인적 쇄신, 정책 쇄신은 물론 당명을 바꾸는 것도 논의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뼛속까지 쇄신론은 모호하다. 재창당은 안된다고 선을 긋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재창당을 뛰어넘는 쇄신이란 도대체 뭔가. 젊은 의원들의 궁금증이다. 박 위원장은 지난해 말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생을 챙기고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라며 그게 국민이 원하고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매우 한가한 소리다. 노동자들의 절박한 파업을 두고 사용자가 곧잘 펴는 “그래도 공장은 돌려야 한다”거나 “방송은 중단되면 안된다”는 논리 같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집권당의 근본적 변화, 즉 다른 정치다. 민생, 일자리도 중요하지만 별개의 문제다. 거기에다 대고 뼛속까지 바꾸겠지만 재창당은 안된다는 건 말장난이다.
<한나라당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9일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구태정치 그리고 과거의 잘못된 정치 관행과 단절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고 말하고 있다.>
두번째는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의 ‘보수 탈색론’이다. 한나라당 정강·정책에서 보수란 말을 빼자는 것이다. ‘보수’라고 하면 젊은층에서는 ‘꼴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난 서울시장 선거를 보면 이념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며, 다른 나라 보수정당도 정강·정책에 보수를 넣은 나라는 별로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해 진짜 ‘꼴통’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인사들이 저항한 것은 치지도외(置之度外)해도 괜찮다. 그러나 김 위원이나 그의 제안에 동조한 한나라당 사람들은 중대한 오해를 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이 지경이 된 건 그들이 보수가 아니라 사이비 보수이기 때문이다. 틈만 나면 극우적 색깔론을 펴고 복지 포퓰리즘 타령을 하는 집단, 자신과 기득적인 보수층의 이익만 보수하는 정당, 온갖 도덕적 해이의 온상으로 국민 뇌리에 각인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나라당이 진정한 쇄신을 하려면 현 상황이 자업자득임을 인정하고 보수의 가치를 바로 세우는 일에 나서는 것이 순서다. 이건 정강·정책에서 보수를 빼고 넣는 것을 넘어선, 정체성과 철학의 문제다. 보수가 나쁜 것으로 인식된 것은 보수를 제대로 보수하지 못한 한나라당 탓이 크다. 지금 한나라당식 보수는 기득권 수호와 동의어일 뿐이다. 그렇다고 정강·정책에서 보수를 빼 사태를 만회하겠다는 것은 꼼수다. 그런 걸 장두노미(藏頭露尾)라 한다.
지금까지 한나라당이 정체성을 바로 세우겠다며 내놓은 발상은 이런 꼼수 수준을 넘지 못했다. 가령 안상수 대표가 2010년 10월 국회연설에서 밝힌 ‘부채꼴 정당’론이 있다. 당시 안 대표는 보수정당인 한나라당이 “진보의 목소리도 과감하게 수용하는 개혁적 중도 보수 정당”으로 거듭나겠다고 다짐했다. 경향신문 손동우 논설위원은 한 칼럼에서 왼쪽 진보에서 중도를 거쳐 오른쪽 보수를 포괄하는 이 정당을 ‘부채꼴 정당’이라고 명명했다. 야구에서 장효조나 추신수가 보여준 부채꼴 타법에 빗댄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런 불세출의 타자는 있되 정당은 없다. 손 위원은 “한나라당은 ‘보수’ 앞에 촌스러운 수식어를 덕지덕지 붙이지 마라. ‘보수’ 하나만 제대로 해도 욕할 사람 그렇게 많지 않다”고 썼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한나라당 일각에서 나온 재창당론은 실현 가능할까. 남경필·정두언 의원 등 당내 재창당파들은 비대위 체제에서는 당 쇄신도, 근본적 변화도 어렵다며 끝없이 추락하는 당을 해체하고 재창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태근·김성식 의원은 이 때문에 탈당했다. 정태근 의원은 “한나라당은 자기 정화·혁신 능력을 상실했다”면서 “재창당이야말로 얽매였던 모든 것을 털어내고 새롭게 정당을 만들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재창당론은 가장 이상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현실성이 떨어지는 당 쇄신책인 듯하다. 순환논리 같지만 비대위 쪽도, 비대위에 반대하는 쪽도 이들 주장에 우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한나라당에서 진행되는 쇄신은 호박에 줄긋기로 끝날 공산이 매우 크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죽었다 깨도 안될 것이란 예감이 든다. 냉전·반공 체제의 산물인 수구정당의 단단한 껍데기를 부수는 일은 그만큼 쉽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이 땅에서 제대로 된 정통보수당이 출현한다면 그것 자체가 엄청난 정치 발전을 의미할 것이다. 내가 말하는 진짜 보수정당은 최소한 파시즘적 색깔론의 시대착오성과 전근대성을 깨닫고 비판하는 정당이다. 그게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 듯 좌와 우가 서로를 인정하는 세상의 모습이 될 것이다. 그런 보수정당의 출현을 언제나 볼 수 있을까.
입력 : 2012-01-10 21:03:26
첫번째는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의 ‘뼛속까지 쇄신론’이다. 그는 재창당을 뛰어넘는 쇄신을 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비대위원장을 맡기 직전 쇄신파들을 만나 “당의 인적 쇄신, 정책 쇄신은 물론 당명을 바꾸는 것도 논의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뼛속까지 쇄신론은 모호하다. 재창당은 안된다고 선을 긋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재창당을 뛰어넘는 쇄신이란 도대체 뭔가. 젊은 의원들의 궁금증이다. 박 위원장은 지난해 말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생을 챙기고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라며 그게 국민이 원하고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매우 한가한 소리다. 노동자들의 절박한 파업을 두고 사용자가 곧잘 펴는 “그래도 공장은 돌려야 한다”거나 “방송은 중단되면 안된다”는 논리 같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집권당의 근본적 변화, 즉 다른 정치다. 민생, 일자리도 중요하지만 별개의 문제다. 거기에다 대고 뼛속까지 바꾸겠지만 재창당은 안된다는 건 말장난이다.
<한나라당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9일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구태정치 그리고 과거의 잘못된 정치 관행과 단절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고 말하고 있다.>
두번째는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의 ‘보수 탈색론’이다. 한나라당 정강·정책에서 보수란 말을 빼자는 것이다. ‘보수’라고 하면 젊은층에서는 ‘꼴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난 서울시장 선거를 보면 이념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며, 다른 나라 보수정당도 정강·정책에 보수를 넣은 나라는 별로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해 진짜 ‘꼴통’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인사들이 저항한 것은 치지도외(置之度外)해도 괜찮다. 그러나 김 위원이나 그의 제안에 동조한 한나라당 사람들은 중대한 오해를 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이 지경이 된 건 그들이 보수가 아니라 사이비 보수이기 때문이다. 틈만 나면 극우적 색깔론을 펴고 복지 포퓰리즘 타령을 하는 집단, 자신과 기득적인 보수층의 이익만 보수하는 정당, 온갖 도덕적 해이의 온상으로 국민 뇌리에 각인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나라당이 진정한 쇄신을 하려면 현 상황이 자업자득임을 인정하고 보수의 가치를 바로 세우는 일에 나서는 것이 순서다. 이건 정강·정책에서 보수를 빼고 넣는 것을 넘어선, 정체성과 철학의 문제다. 보수가 나쁜 것으로 인식된 것은 보수를 제대로 보수하지 못한 한나라당 탓이 크다. 지금 한나라당식 보수는 기득권 수호와 동의어일 뿐이다. 그렇다고 정강·정책에서 보수를 빼 사태를 만회하겠다는 것은 꼼수다. 그런 걸 장두노미(藏頭露尾)라 한다.
지금까지 한나라당이 정체성을 바로 세우겠다며 내놓은 발상은 이런 꼼수 수준을 넘지 못했다. 가령 안상수 대표가 2010년 10월 국회연설에서 밝힌 ‘부채꼴 정당’론이 있다. 당시 안 대표는 보수정당인 한나라당이 “진보의 목소리도 과감하게 수용하는 개혁적 중도 보수 정당”으로 거듭나겠다고 다짐했다. 경향신문 손동우 논설위원은 한 칼럼에서 왼쪽 진보에서 중도를 거쳐 오른쪽 보수를 포괄하는 이 정당을 ‘부채꼴 정당’이라고 명명했다. 야구에서 장효조나 추신수가 보여준 부채꼴 타법에 빗댄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런 불세출의 타자는 있되 정당은 없다. 손 위원은 “한나라당은 ‘보수’ 앞에 촌스러운 수식어를 덕지덕지 붙이지 마라. ‘보수’ 하나만 제대로 해도 욕할 사람 그렇게 많지 않다”고 썼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한나라당 일각에서 나온 재창당론은 실현 가능할까. 남경필·정두언 의원 등 당내 재창당파들은 비대위 체제에서는 당 쇄신도, 근본적 변화도 어렵다며 끝없이 추락하는 당을 해체하고 재창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태근·김성식 의원은 이 때문에 탈당했다. 정태근 의원은 “한나라당은 자기 정화·혁신 능력을 상실했다”면서 “재창당이야말로 얽매였던 모든 것을 털어내고 새롭게 정당을 만들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재창당론은 가장 이상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현실성이 떨어지는 당 쇄신책인 듯하다. 순환논리 같지만 비대위 쪽도, 비대위에 반대하는 쪽도 이들 주장에 우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한나라당에서 진행되는 쇄신은 호박에 줄긋기로 끝날 공산이 매우 크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죽었다 깨도 안될 것이란 예감이 든다. 냉전·반공 체제의 산물인 수구정당의 단단한 껍데기를 부수는 일은 그만큼 쉽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이 땅에서 제대로 된 정통보수당이 출현한다면 그것 자체가 엄청난 정치 발전을 의미할 것이다. 내가 말하는 진짜 보수정당은 최소한 파시즘적 색깔론의 시대착오성과 전근대성을 깨닫고 비판하는 정당이다. 그게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 듯 좌와 우가 서로를 인정하는 세상의 모습이 될 것이다. 그런 보수정당의 출현을 언제나 볼 수 있을까.
입력 : 2012-01-10 21: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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