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전남 보성에서 기독교 광신도 부부가 감기에 걸린 남매 셋을 굶기고 폭행해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부부는 10살, 8살, 5살 난 세 남매에게 잡귀가 붙었다며 허리띠와 파리채로 때렸다. 아이들은 숨지기 전 일주일 이상 물 말고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한 아이의 일기가 나중에 공개됐다. 숨지기 열흘 전쯤 쓴 이 일기엔 “2012년 1월20일. TV를 보았다. 재미있다. 런닝맨이 재밌었다”고 적혀 있었다.
이 사건이 알려진 지 며칠 후 서울 강남에 사는 고교 1학년 남학생(16)이 아파트 7층에서 뛰어내려 숨졌다. 페이스북에 “공부가 어렵다. 학원 다니기가 힘들다”는 글을 남기고서였다. 이 아이는 이른바 ‘A급 학군’에 성적도 상위권인 학생이었다. 말수가 적고 수학을 잘하고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경찰은 이 학생이 학업 스트레스로 자살한 것으로 보고 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삽화 openink
나는 이 두 사건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본다. 그냥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매우 강하다. 둘 다 본질적으로 폭력적 구조에서 발생했다. 세 남매는 광신자 부모의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성경 구절을 맹신한 부모한테 39번씩 네 차례나 매를 맞아야 했다. 몸서리쳐지는 폭력적 상황 속에 철저히 방치돼 있었다. 그 속에서 죄 없는 아이들이 겪었을 절망감, 고통은 어떠했을까. 비뚤비뚤한 연필 글씨로 무슨 TV프로가 재미있었다고 적은 일기가 가슴을 친다.
강남 고교생도 거대한 폭력 앞에 방치됐다. 그 폭력은 매와 같은 물리력은 아니었을지언정 너무 강했다. 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를 결심하게 할 만큼 그랬다. 제도적·조직적인 폭력이기에 더 고질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였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학교공부, 학원수업이었다. 심야 보충수업, 연중 4번 치러야 하는 정기시험, 수행평가, 각종 일제고사, 일제고사에 대비하는 학교별 시험, 일년 내내 아이들을 포위한 시험, 시험이었다. 성적표, 입시광풍, 학벌지상주의 이런 것들이 다 그에게 폭력적이었을 것이다. 다른 많은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황주환 교사는 어제 한겨레신문에 쓴 칼럼 ‘그런 당신이 학교폭력을 비난할 수 있는가’에서 요즘 학교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오늘의 학교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잔혹하다. 궁금하면 다시 한번 다녀보시라. 학교는 지옥이다.”
너무나 많은 청소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2010년 10대 자살자는 353명으로 하루 1명꼴이었다. 10대 사망원인의 1위는 2008년까지 교통사고였으나 2009년부터는 자살이다. 이를 요즘 애들이 유약해졌기 때문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황 교사의 설명은 다르다. 훨씬 폭력과 고통의 강도가 높아졌다는 쪽이다.
학교폭력도 학벌주의, 공교육 붕괴란 거대한 폭력적 구도에서 파생된 것으로 봐야 한다. 가령 일부 학생은 ‘목숨을 끊는 대신’ 다른 학생들을 괴롭히는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있다.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면서 ‘일진’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경우다. 서이종 서울대 교수는 “학교폭력과 학업 스트레스는 동떨어진 사안이 아니라 연관된 것”이라고 말했다.
세 남매 사건과 고교생 투신 사건 사이에 다른 것이 있다면 희생자가 어떻게 방치됐느냐 하는 부분이다. 세 남매가 사회로부터 격리된 채 철저하게 방치된 경우라면, 고교생은 완전히 노출된 상태에서 방치되었다. 아이들이 메말라가는 것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좋은 대학을 나와야지”라거나 “달리는 버스에서 내리게 할 수 없다”는 당위론, 현실론에 밀려 알면서도 방치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아이들은 체념하고 냉소하고 침묵 속에 꽃잎처럼 몸을 던진다. 1980년대 후반 한 여중생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란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뒤 20여년 세월이 흘렀건만 상황은 나아지기는커녕 계속 악화되고 있다. 옛날 대학생들이 분신으로 독재에 항거한 시절이 있었다. 이젠 시대가 바뀌어 어린 학생들이 몸을 던진다. 무엇에 대한 항거인가. 이 ‘죽음의 굿판’을 어떻게 멈출 것인가.
이것은 교육분야에 국한된 게 아니라 사회 전반의 진보 개혁과 맞물린 문제다. 아이들이 입시지옥에서 못 헤어나는 나라에서 어떤 다른 진보가 가능할까. 학벌주의 타파 없는 진보 개혁 구호는 위선적이다.
나는 2007년 대선 전 ‘여유교육을 고민해야 한다’는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교육은 국가경쟁력과 관련이 있는가. 물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패해도 경제만 키우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과 판단력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다. 온 사회를 옭아맨 부패의 사슬을 끊어내는 기능을 기대할 곳은 교육밖에 없다. 그런데 교육문제에 대한 대선주자들의 관심은 자사고 증설이나 영어인증제 등 ‘경쟁력 제고’에만 치우쳐 있다.”
아이들을 ‘죽음의 굿판’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매우 정치적인 문제다. 절대로 정치가 해결해야 할 문제란 점에서 그렇다.
막다른 골목에 갇혀있는 아이들에게 이상의 이 시를 보낸다.
이 사건이 알려진 지 며칠 후 서울 강남에 사는 고교 1학년 남학생(16)이 아파트 7층에서 뛰어내려 숨졌다. 페이스북에 “공부가 어렵다. 학원 다니기가 힘들다”는 글을 남기고서였다. 이 아이는 이른바 ‘A급 학군’에 성적도 상위권인 학생이었다. 말수가 적고 수학을 잘하고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경찰은 이 학생이 학업 스트레스로 자살한 것으로 보고 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삽화 openink
나는 이 두 사건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본다. 그냥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매우 강하다. 둘 다 본질적으로 폭력적 구조에서 발생했다. 세 남매는 광신자 부모의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성경 구절을 맹신한 부모한테 39번씩 네 차례나 매를 맞아야 했다. 몸서리쳐지는 폭력적 상황 속에 철저히 방치돼 있었다. 그 속에서 죄 없는 아이들이 겪었을 절망감, 고통은 어떠했을까. 비뚤비뚤한 연필 글씨로 무슨 TV프로가 재미있었다고 적은 일기가 가슴을 친다.
강남 고교생도 거대한 폭력 앞에 방치됐다. 그 폭력은 매와 같은 물리력은 아니었을지언정 너무 강했다. 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를 결심하게 할 만큼 그랬다. 제도적·조직적인 폭력이기에 더 고질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였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학교공부, 학원수업이었다. 심야 보충수업, 연중 4번 치러야 하는 정기시험, 수행평가, 각종 일제고사, 일제고사에 대비하는 학교별 시험, 일년 내내 아이들을 포위한 시험, 시험이었다. 성적표, 입시광풍, 학벌지상주의 이런 것들이 다 그에게 폭력적이었을 것이다. 다른 많은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황주환 교사는 어제 한겨레신문에 쓴 칼럼 ‘그런 당신이 학교폭력을 비난할 수 있는가’에서 요즘 학교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오늘의 학교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잔혹하다. 궁금하면 다시 한번 다녀보시라. 학교는 지옥이다.”
너무나 많은 청소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2010년 10대 자살자는 353명으로 하루 1명꼴이었다. 10대 사망원인의 1위는 2008년까지 교통사고였으나 2009년부터는 자살이다. 이를 요즘 애들이 유약해졌기 때문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황 교사의 설명은 다르다. 훨씬 폭력과 고통의 강도가 높아졌다는 쪽이다.
학교폭력도 학벌주의, 공교육 붕괴란 거대한 폭력적 구도에서 파생된 것으로 봐야 한다. 가령 일부 학생은 ‘목숨을 끊는 대신’ 다른 학생들을 괴롭히는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있다.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면서 ‘일진’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경우다. 서이종 서울대 교수는 “학교폭력과 학업 스트레스는 동떨어진 사안이 아니라 연관된 것”이라고 말했다.
세 남매 사건과 고교생 투신 사건 사이에 다른 것이 있다면 희생자가 어떻게 방치됐느냐 하는 부분이다. 세 남매가 사회로부터 격리된 채 철저하게 방치된 경우라면, 고교생은 완전히 노출된 상태에서 방치되었다. 아이들이 메말라가는 것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좋은 대학을 나와야지”라거나 “달리는 버스에서 내리게 할 수 없다”는 당위론, 현실론에 밀려 알면서도 방치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아이들은 체념하고 냉소하고 침묵 속에 꽃잎처럼 몸을 던진다. 1980년대 후반 한 여중생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란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뒤 20여년 세월이 흘렀건만 상황은 나아지기는커녕 계속 악화되고 있다. 옛날 대학생들이 분신으로 독재에 항거한 시절이 있었다. 이젠 시대가 바뀌어 어린 학생들이 몸을 던진다. 무엇에 대한 항거인가. 이 ‘죽음의 굿판’을 어떻게 멈출 것인가.
이것은 교육분야에 국한된 게 아니라 사회 전반의 진보 개혁과 맞물린 문제다. 아이들이 입시지옥에서 못 헤어나는 나라에서 어떤 다른 진보가 가능할까. 학벌주의 타파 없는 진보 개혁 구호는 위선적이다.
나는 2007년 대선 전 ‘여유교육을 고민해야 한다’는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교육은 국가경쟁력과 관련이 있는가. 물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패해도 경제만 키우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과 판단력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다. 온 사회를 옭아맨 부패의 사슬을 끊어내는 기능을 기대할 곳은 교육밖에 없다. 그런데 교육문제에 대한 대선주자들의 관심은 자사고 증설이나 영어인증제 등 ‘경쟁력 제고’에만 치우쳐 있다.”
아이들을 ‘죽음의 굿판’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매우 정치적인 문제다. 절대로 정치가 해결해야 할 문제란 점에서 그렇다.
막다른 골목에 갇혀있는 아이들에게 이상의 이 시를 보낸다.
오감도(烏瞰圖)
시 제 1 호
13인의아해(兒孩)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 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조선중앙일보>(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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