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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웅 칼럼

서울시장 선거와 그 후

10·26 서울시장 선거를 두고 수많은 관전평·분석글들이 나왔지만 필자도 이 선거에 대한 개인적 소회로부터 말문을 열고 싶다. 지금 복기해도 손색없을 만큼 정치적 의미가 큰 사건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선거 당일 필자는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가는 경험을 했다. 한나라당의 비공식 자체 조사에서 나경원 후보가 앞서고 있다는 소식이 지옥이었다. 그럼 그렇지. 그 색깔론, 네거티브 공세에 안 넘어 갈 리 있나, 이 나라 민초들이. 내년 선거도 날 샜다. 1 대 99의 양극화는 더 고착화하겠구나. 그런 심리상태 때문이었는지 방송3사의 첫 출구조사 발표 1보마저 오독했다. 내 눈엔 분명 나 후보가 박원순 후보를 앞선 걸로 읽혔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 반대였다. 갑자기 지옥이 천국으로 바뀌었다.

당선된 박 시장은 당선 소감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민이 권력을 이기고, 투표가 낡은 시대를 이겼습니다. 상식과 원칙이 이겼습니다.” ‘상식과 원칙이 이겼다’는 그의 언명이 참 듣기 좋다. 그는 선거 기간에도 무슨 보수와의 싸움이니, 진보의 승리니 하는 거창한 말은 피하고 상식과 원칙, 그리고 변화를 강조했다. 그렇게 해서 그가 한나라당과 조·중·동의 무차별적이고 집요한 색깔론을 너끈히 이겨냈다는 건 거의 기적이다. 이 점에서 그 기쁨은 2002년 노무현 대통령이 이회창 후보를 뜻밖에 누르고 당선됐을 때보다도 컸던 것 같다.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은 정권교체의 가망이 보인다는 것이다. 서울시장 선거는 차기 ‘대세’로 평가받던 박근혜 의원으로 하여금 스스로 “대세란 없다”고 말하도록 만들었다. 나경원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그가 나서고, 조·중·동이 혼신을 다하고 선관위가 별별 불공정한 짓을 해도 안 통했다. SNS와 나꼼수 방송이 강력한 힘을 발휘해 천방지축 색깔론을 우스운 걸로 만들어 버렸다. 대세가 없음을 발견한 건 이번 선거가 가져다 준 망외의 소득이다.

지방선거 결과를 곧바로 다음 총선·대선 전망과 연결짓는 것이 성급하며 부박(浮薄)할 수 있다. 정치판엔 수많은 변수들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부박함은 정권교체의 절박성에 비추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한 정권이 얼마나 총체적으로, 그리고 빠른 속도로 국가·사회를 뒷걸음질치게 만들 수 있는지 이 정권만큼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건 정권의 보수·진보성을 논하기 이전의 문제다. 서울시장 선거에서도 표심을 결정적으로 붙잡은 건 보수·진보 이전에 20~40대의 생존에 관한 문제였다. 

                          타는 목마름으로

                          일러스트 권신아


이 정권 아래서는 학문마저 정치화해 처절하게 망가지고 있다. 어제 교육과학기술부는 끝내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서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꿔 가르치도록 독단을 행사했다. 무섭고 또 우습다. 지금 현실에선 잘 있는 민주에다 어거지로 자유를 갖다 붙여놓고,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겠다는 거냐”고 눈을 부라리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어릴 적 아이들끼리 “내가 언제 니네 집 장독 깼니”라는 말로 괜한 시비를 건 일이 기억난다. 가만 있는 사람 도발하는 데는 이게 효과적이다. 이런 비논리는 한나라당 여성의원에 의해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의원이 있다면 북한에 가서 의원 하라”는 색깔론으로 변용됐다.

이런 식의 강변·비논리가 4대강 사업, 종합편성채널, 한·미 FTA 등 수많은 정책에서 횡행하고 있다. 유독 이 정권 와서 ‘우기면 된다’가 일상화한 것이다. 그 근본 원인은 여러 갈래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의 행사를 우습게 여기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이 정권에 절실한 건 그런 비논리를 빨리 청산하고 이성과 상식을 복권시키는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 정권에 쇄신과 환골탈태를 기대하기는 매우 어려워 보인다. 무슨 정치적 사건이 있으면 정치인도 성찰을 통해 새 모습을 보여야 하건만 청와대도 한나라당도 그와 거리가 멀다. 주민투표에서 져도 사실상 이겼다고 하고, 서울시장 선거에서 져도 무승부라고 하는 정신으로는 어떤 쇄신 얘기도 구호에 그칠 뿐이다. 소장파가 모처럼 쓴소리를 해도 찻잔속 태풍에 그치는 한나라당으론 될 게 없다. 정권교체의 가능성을 높여주는 결정적 요인은 이 대목에서 찾아진다. 한나라당의 전반적 분위기는 아직도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고 있는 듯하다는 점이다. 만약 한나라당이 지금이라도 환골탈태한다면 정권교체를 열망하고 있는 ‘이쪽’으로선 비상사태가 되겠지만. 다행히 저들은 매를 벌고 있다. 김진숙은 고공 크레인에서 못 내려오고 있다.

정권교체의 조건은 성숙했다. 문제는 필자가 ‘이쪽’이라고 지칭한 세력의 정체다. 누가 정권교체를 이끌 것인가. 이 정권으로부터 신물나게 ‘좌파정권’ 소리를 들어온 쪽인가. 또는 안철수 원장과 시민세력인가. 진보인가. 범민주인가. 야권이 스스로 교통정리를 해 내는 역량 여하에 이 나라 장래가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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