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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웅 칼럼

사는 게 조금 외롭고 쓸쓸해서

송경동 시인이 구속되었다. 솔직히 필자는 송 시인을, 그의 시세계를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런 탓이었을까, 처음 그가 구속됐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무덤덤했다. 어쩌면 그건 과거의 학습효과 덕분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지난 세월 얼마나 많은 시인 작가들이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던가. 군사정권 시절 시인 작가는 연행되고 구속되고 해직되고 단식투쟁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필화사건, 폐간도 친숙한 언어였다. 한순간 옛 기억에 익숙해져 있는 내가 미안해진 건 송 시인의 ‘수상소감문’을 접하면서였다. 그는 지난주 부산의 경찰서 유치장에서 신동엽창작상 수상 소식을 들었다. 22일 열린 시상식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온 그의 아내가 대신 수상소감문을 읽었다.

 “…조금은 편안하고 행복하고 안전한, 사람들의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혹여 제가 무슨 고민이 깊어 그랬을 거라고 생각지 말아 주십시오. 다만 사는 게 조금 외롭고 쓸쓸해서였을 거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탁발한 시인의 길이었을 거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소감문의 이 대목이 내 가슴을 쳤다. 누선을 자극했다. 자신이 그런 일을 한 게 ‘다만 사는 게 조금 외롭고 쓸쓸해서’라니, 아아 시인의 감수성이란 바로 이런 것이던가.

그는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를 기획했다는 ‘죄’로 구속됐지만 그 전에도 무던히 많은 곳을 찾아다녔다. 대추리, 기륭전자, 용산재개발, 재능교육, 쌍용자동차…. 하나같이 삶의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이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현장이었다. 이런 그에게 저 수구신문들은 ‘시인의 탈을 쓴 전문시위꾼’이란 이름을 붙였다. 가당치 않다. 그는 시인이었고, 그렇게 하는 이유는 ‘다만 사는 게 조금 외롭고 쓸쓸해서’였던 거다. 이들의 지친 삶을 결코 남의 일이라고 외면해버릴 수 없었던 거다.

 

                         

 

희망버스 기획자로 알려진 송경동 시인이 지난 15일 오후 309일간의 크레인 농성을 끝내고 내려온 김진숙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송 시인은 그게 즐거울까. 이태 전엔가 쓴 ‘혜화경찰서에서’란 시에서 경찰은 잡혀온 그에게 ‘알아서 불라’고 한다. 시는 “…무엇을, 나는 불까/ 풍선이나 불었으면 좋겠다/ 풀피리나 불었으면 좋겠다/ 하품이나 늘어지게 불었으면 좋겠다/ 트럼펫이나 아코디언도 좋겠지…”라고 노래한다. 그런 동문서답을 통해 안온한 일상에 대한 그리움을 표시한 듯하다.

몇해 전 비정규직 노동자 집회에서 낭독한 ‘시를 쓸 수 없다’란 시에서는 왜 시를 쓰는지를 천명한다. “5류지만 명색이 시인인데/ 꽃이나 새나 나무에 기대/ 세사에 치우치지 않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한번 써보고 싶은데” 절박한 현실들이 그런 시를 쓸 수 없게 만들어 안타깝다는 심정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나도 알고 보면 그냥 시인만 되고 싶은 시인/ 하지만 이 시대는 쉽게, 시를 쓸 수 없는 시대”란 결론을 내린다. 그는 “미안하다. 시야”라고 했다.

그에게서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없는 심정을 들으면서 저 고전적 ‘잠수함 속의 토끼’ 비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는 잠수함 수병 경험을 바탕으로 시인과 작가는 잠수함 속의 토끼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옛날 잠수함엔 토끼를 키워 관찰했다. 산소에 민감한 토끼는 사람보다 먼저 산소 부족에 반응해 호흡곤란으로 죽는다. 토끼는 경고등이다. 한 사회와 시대 속 시인도 그러하다. 시인이 예민한 감수성을 잃어버리면, 고통스러워할 줄 모르면 세상이 위험에 처한다.

쑥스럽지만 개인 얘기를 한다면, 나이를 먹어갈수록 시가 좋다. 산문에 없는 시의 여백이 좋다. 논리보단 직관과 영감, 사변보다는 통찰력과 감수성이 더 와닿는다. 고등학교 땐가 배운 미당의 ‘국화 옆에서’가 지닌 절창성이 새롭다.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라고 한 미당의 상상력, 감수성에 탄복한다.

그러나 어떤 시인에게는 시대의 감수성이 시대와 불화하는 것이 된다. 그는 숙명적으로 잠수함 속 토끼처럼 예민한 시대의 감수성을 앓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한번 써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청마의 ‘바위’처럼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고 노래하고 싶지만 그에겐 인종(忍從)만이 미덕이 아니다. 결코 침묵할 수 없다. 그에게도 잠 못이루는 밤이 있지만 그건 비정규직과 함께 나누는 아픔 때문이다. 그는 고통을 회피하지 않는, 더 정확하게는 “회피할 수 없도록 운명지어진” 존재다.

며칠 전 수구신문들은 반 한·미 FTA 집회에서 경찰이 맞았다며 ‘경찰서장이 얻어맞는 나라’라고 숨넘어갈 듯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진짜 큰 문제는 ‘시인을 구속하는 나라’다. 시인의 희망을, 타인의 고통과 절망을 외면하지 못하는 여린 마음을 불법이라고 낙인찍는 나라다. 정말 절망은 “사는 게 조금 외롭고 쓸쓸해서” 함께 희망을 얘기하자는 시인의 마음을 묵살해버리는 나라다. 끝난 줄 알았던 저항시의 계절도 돌아왔나. 이 쓸쓸한 만추, 한줄기 바람이 불어 우수수 마지막 낙엽을 떨어뜨린다.

입력 : 2011-11-29 21: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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