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편안하고 행복하고 안전한, 사람들의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혹여 제가 무슨 고민이 깊어 그랬을 거라고 생각지 말아 주십시오. 다만 사는 게 조금 외롭고 쓸쓸해서였을 거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탁발한 시인의 길이었을 거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소감문의 이 대목이 내 가슴을 쳤다. 누선을 자극했다. 자신이 그런 일을 한 게 ‘다만 사는 게 조금 외롭고 쓸쓸해서’라니, 아아 시인의 감수성이란 바로 이런 것이던가.
그는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를 기획했다는 ‘죄’로 구속됐지만 그 전에도 무던히 많은 곳을 찾아다녔다. 대추리, 기륭전자, 용산재개발, 재능교육, 쌍용자동차…. 하나같이 삶의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이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현장이었다. 이런 그에게 저 수구신문들은 ‘시인의 탈을 쓴 전문시위꾼’이란 이름을 붙였다. 가당치 않다. 그는 시인이었고, 그렇게 하는 이유는 ‘다만 사는 게 조금 외롭고 쓸쓸해서’였던 거다. 이들의 지친 삶을 결코 남의 일이라고 외면해버릴 수 없었던 거다.
희망버스 기획자로 알려진 송경동 시인이 지난 15일 오후 309일간의 크레인 농성을 끝내고 내려온 김진숙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송 시인은 그게 즐거울까. 이태 전엔가 쓴 ‘혜화경찰서에서’란 시에서 경찰은 잡혀온 그에게 ‘알아서 불라’고 한다. 시는 “…무엇을, 나는 불까/ 풍선이나 불었으면 좋겠다/ 풀피리나 불었으면 좋겠다/ 하품이나 늘어지게 불었으면 좋겠다/ 트럼펫이나 아코디언도 좋겠지…”라고 노래한다. 그런 동문서답을 통해 안온한 일상에 대한 그리움을 표시한 듯하다.
몇해 전 비정규직 노동자 집회에서 낭독한 ‘시를 쓸 수 없다’란 시에서는 왜 시를 쓰는지를 천명한다. “5류지만 명색이 시인인데/ 꽃이나 새나 나무에 기대/ 세사에 치우치지 않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한번 써보고 싶은데” 절박한 현실들이 그런 시를 쓸 수 없게 만들어 안타깝다는 심정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나도 알고 보면 그냥 시인만 되고 싶은 시인/ 하지만 이 시대는 쉽게, 시를 쓸 수 없는 시대”란 결론을 내린다. 그는 “미안하다. 시야”라고 했다.
그에게서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없는 심정을 들으면서 저 고전적 ‘잠수함 속의 토끼’ 비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는 잠수함 수병 경험을 바탕으로 시인과 작가는 잠수함 속의 토끼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옛날 잠수함엔 토끼를 키워 관찰했다. 산소에 민감한 토끼는 사람보다 먼저 산소 부족에 반응해 호흡곤란으로 죽는다. 토끼는 경고등이다. 한 사회와 시대 속 시인도 그러하다. 시인이 예민한 감수성을 잃어버리면, 고통스러워할 줄 모르면 세상이 위험에 처한다.
쑥스럽지만 개인 얘기를 한다면, 나이를 먹어갈수록 시가 좋다. 산문에 없는 시의 여백이 좋다. 논리보단 직관과 영감, 사변보다는 통찰력과 감수성이 더 와닿는다. 고등학교 땐가 배운 미당의 ‘국화 옆에서’가 지닌 절창성이 새롭다.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라고 한 미당의 상상력, 감수성에 탄복한다.
그러나 어떤 시인에게는 시대의 감수성이 시대와 불화하는 것이 된다. 그는 숙명적으로 잠수함 속 토끼처럼 예민한 시대의 감수성을 앓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한번 써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청마의 ‘바위’처럼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고 노래하고 싶지만 그에겐 인종(忍從)만이 미덕이 아니다. 결코 침묵할 수 없다. 그에게도 잠 못이루는 밤이 있지만 그건 비정규직과 함께 나누는 아픔 때문이다. 그는 고통을 회피하지 않는, 더 정확하게는 “회피할 수 없도록 운명지어진” 존재다.
며칠 전 수구신문들은 반 한·미 FTA 집회에서 경찰이 맞았다며 ‘경찰서장이 얻어맞는 나라’라고 숨넘어갈 듯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진짜 큰 문제는 ‘시인을 구속하는 나라’다. 시인의 희망을, 타인의 고통과 절망을 외면하지 못하는 여린 마음을 불법이라고 낙인찍는 나라다. 정말 절망은 “사는 게 조금 외롭고 쓸쓸해서” 함께 희망을 얘기하자는 시인의 마음을 묵살해버리는 나라다. 끝난 줄 알았던 저항시의 계절도 돌아왔나. 이 쓸쓸한 만추, 한줄기 바람이 불어 우수수 마지막 낙엽을 떨어뜨린다.
입력 : 2011-11-29 21:01:09
'김철웅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런 보수정당 볼 수 없나 (0) | 2012.01.11 |
---|---|
비논리 나라 (0) | 2011.12.21 |
서울시장 선거와 그 후 (0) | 2011.11.09 |
99 대 1 투쟁, 그 다음은 (0) | 2011.10.19 |
자유·민주보다 더 중요한 것 (0) | 2011.0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