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시위를 보면서 문득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구절이 떠올랐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이 케케묵은 구호가 생각난 게 아주 뜬금없는 건 아니다. 시위의 성격과 전개양상에 비추어 썩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우선 이 시위는 분노한 사람들이 80여개 나라, 900여 도시에서 동시에 벌였다.
단결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무엇에 분노한 사람들인가. 뭉뚱그려 빈부격차가 갈수록 심해지는 현실에 절망하고 분노한 사람들이다. 이들을 마르크스식으로 분류하면 부르주아지가 아닌 프롤레타리아트, 곧 노동자다.

이들은 다수다. 얼마 전까진 이들을 선택된 20%에 끼지 못한 80%라 불렀는데 이번엔 이들 스스로 “우리는 99%다”란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욕 월스트리트를 점거한 이들이 그랬다. 나머지 1%는 월스트리트의 잘나가는 부자들이다. 그런 점에서 80 대 20에서 99 대 1로의 이행은 그것 자체가 부익부 빈익빈 심화를 드러내는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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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위를 보며 갖는 또 다른 감흥은 위로다. 우리는 한국을 전형적 양극화 심화 사회로 비판해왔지만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전 지구적 현상이란 점을 확인하면서 묘한 동질감과 연대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양극화까지 세계화시켰음을 깨닫는다. 따라서 현재 진행 중인 시위는 첨단 자본주의의 총아인 금융자본이 세계를 초토화시키는 것에 참고 참았던 99%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금융자본주의, 반빈부격차를 외치는 시민들이 국제행동에 나선 이 시위를 필자는 주저 없이 한 시대의 획을 긋는 사건으로 규정한다. 이와 비슷한 국제연대 시위의 원조는 1999년 12월 시애틀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 각료회의 반대 시위였다.
이 시위는 반세계화 운동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켜 ‘반세계화의 세계화’에 기여했다. 그 뒤로 수많은 반세계화·반신자유주의 시위가 있었지만 특정 행사를 겨냥한 일시적 시위였다. 이에 비해 이번 시위는 동시다발적으로 어떤 지역을 점거해 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먹고사는 문제를 털어놓고 공감·연대한다는 면에서 차이가 있다. 점거한다는 발상 자체가 발칙했다. 그러면서 참가자들은 자신의 계급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다진다.

한국 서울역 광장에서는 ‘빈곤철폐의 날’ 집회가 열렸다. 이곳에서 박경석 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가 한 말은 경청을 요한다.

“가난은 자기 탓이란 말에 속아 가난을 극복하려 열심히 살아왔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20 대 80의 사회는 1 대 99의 사회로 전락했고 생존권은 박살났다. 우리 잘못이 아닌데도 우리를 가난하게 만드는 권력과 자본에 맞서 싸워야 한다.”

참가자들은 TV프로그램 ‘나는 가수다’를 패러디한 ‘나는 가난하다’라는 노래공연도 열었다. 그의 말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를 푸는 일은 쉽지 않다. 오늘날 도처에서 목격되듯 1%가 강고하게 움켜쥔 것을 결코 놓으려 하지 않는 데다, 99% 가운데도 자발적 부역자들이 적지 않게 포진해 있다.
이들의 논리는 매우 단순하다. 이런 시위는 열등한, 낙오한 사회불만세력의 일시적 행동이므로 무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이 잘못됐든, 시스템에 문제가 있든 다 본인 탓이라거나 운수소관으로 돌려버리려는 것이 현실세계인 것이다.

또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진다는 ‘마태 효과’가 갈수록 강하게 작동하는 듯하다. 불가사의할 정도로 심화하는 양극화는 분명 자본주의의 한계를 보여주지만 그 제도적 극복노력은 미미하기만 하다.
하여 패자부활전의 기회는 줄고 1%의 자본에 대한 나머지 99%의 투쟁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뉴욕 주코티 공원 거리연설에서 “소행성의 충돌 등으로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건 쉽지만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공산당 선언의 본문은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로 시작한다. 그러면서 현대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를 타도할 것임을 논하고 있다. 이 논리에 따라 작금의 동시다발 시위를 계급투쟁으로 규정하고 싶은 충동도 든다.
그러나 거기에 억지로 계급투쟁성을 부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운동은 지금까지 구체적인 목표와 요구를 정리하지 못해 사회변혁의 동력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관측도 있다. 아랍혁명은 예외적 사례일 뿐 민주화를 다 거친 사회에서 혁명을 말하는 것도 안 어울린다.
계급투쟁이 정부전복이나 혁명으로 비화하는 것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평등이 갈수록 심화하는 전 지구적 현실은 자연스럽게 계급의식을 키우고 있다. 참아온 분노의 폭발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혁명의 기운이다. 그리고 이 기운을 살릴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은 계급투표를 통한 선거혁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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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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