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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웅 칼럼

비논리 나라


대한민국은 비논리적인 나라다. 이를 논리적으로 증명해 보려 한다. 편의상 조선일보가 15일자로 쓴 ‘해경 살해 앞에 고개 처박고 벙어리된 한국 좌파의 국적’이란 사설을 예로 시작하자. 이 사설은 중국 불법어로 선원들이 우리 해경을 살해한 사건에 대한 ‘한국 좌파’들의 침묵을 비판하며 다른 두 사건과 비교했다. 하나는 2002년 6월 발생한 여중생 효순·미선양 사망사건이고, 다른 것은 목하 진행 중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시위다.



사설에 따르면 여중생 사망사건이 터지자 좌파들은 미군의 부주의에 의한 교통사고를 고의적 살인사건으로 몰아가는 기민성을 발휘했다. 또 좌파들은 한·미 FTA에 담긴 투자자-국가소송제(ISD)가 한국의 사법주권을 침해한다며 지금도 반대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설은 이렇게 난리를 친 좌파들이 해경 살해사건에는 입도 벙긋 못하고 있다며 “한국 좌파의 국적은 물어볼 필요도 없다”고 결론짓고 있다.

우선 사실관계의 오류부터 지적할 수 있다. 사설은 ‘좌파’가 누굴 말하는 건지 적시하지 않았지만, 좌파로 찍었음직한 사람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통합진보당은 사건 발생 직후 중국이 공식 사과는커녕 유감 표명도 없다는 비판 논평을 냈다.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도 논평을 통해 중국 어선이 불법행위 단속에 흉기로 대항하는 것을 비판하고 중국 정부의 책임을 물었다.

그러나 사실관계의 오류보다 더 큰 문제는 그 뒤편에 깔린 심리다. 이참에 좌파를 비판해야겠다는 의욕이 앞선 탓인지 글은 논리를 소홀히 했다. 그 결과 여러 논리적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첫째, 중국 어선과 정부를 향한 분노가 왜 밑도 끝도 없이 ‘한국 좌파’로 튀었는지 논리적 설명이 없다. 둘째, 해경 살해사건과 여중생 사망사건, 반FTA 시위는 별개의 사건이다. 상대 국가, 사건 내용, 정황이 다 다르다. ‘좌파’가 똑같은 반응을 보여야 할 논리적 이유를 알 수 없다. 조선은 여중생 사건으로 인한 분노와 반FTA 시위에 반미란 혐의를 씌우고 싶은 눈치지만, 증거가 없다. 설사 반미의 표출이라 해도 오늘날 반미는 세계적, 보편적 현상이다. 셋째, 다짜고짜 단세포적 색깔론을 또 동원했다. 사설은 “중화사대(中華事大)에 찌든 한국 좌파”의 국적을 묻는 방식으로 색깔론을 제기했다.


                                                                                                             민중의 소리
<11월 26일 서울 광화문 한.미FTA 반대집회에서 참가자들 사이로 걸어들어가고 있는 박건찬 종로 경찰서장. 이후 박서장이 참가자에게 폭행당했다는 사건이 발생하자 몇몇 신문은 "경찰서장이 맞는 나라"라고 크게 보도했지만, 그런 보도행태의 논리성이 도마에 올랐다.>


이런 비논리는 논점이탈, 비약, 확대해석, 성급한 일반화, 단순비교 등 논리학상 초보적인 오류다. 그러나 복잡한 이론을 꺼낼 것도 없다. 논리란 추론을 ‘이치에 맞게’ 이끌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주장이 앞서면서 논리가 사라졌다. 이게 심해지면 비논리가 일상화한다. 조선 사설은 일례일 뿐 이런 유의 비논리는 정치판, 언론 등 도처에서 목격된다. “좌파는 나쁘다. 왜냐하면 빨갱이니까”란 식의 순환논리가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은 이런 풍토 때문이다.

필자는 지난주 경향신문 ‘여적’란에 이 문제를 주제로 ‘비(非)논리·사(詐)논리’란 글을 썼다. 이에 대한 댓글로 “반미도 좋지만 반중(反中)도 중요하다”거나, “여기서 ‘논리’ 타령이 왜 나오나 모르겠네”란 것이 있었다. 이 댓글에 답하고자 한다. 필자는 반중이 옳지 않다거나, 조선일보 사설의 좌파 비판이 나쁘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그런 사설을 쓰더라도 논리적으로 이치가 닿아야 한다는 말을 한 것이다. 조선 사설에 달린 많은 댓글 중 간략하게 “우와 글에 논리가 제로야”라는 말로 비논리성을 지적한 게 있었는데, 정곡을 찔렀다.

그 점에서 이른바 논리적 정합성(整合性)은 진보·보수 사이 논쟁 이전의 문제다. 보수든 진보든 논리가 안 닿는 일방적 강변을 넘어 제대로 된 토론이 가능하려면, 논리가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이뤄져야 한다. 그 전제 아래 보수와 진보는 색깔론 수준의 치졸한 인신공격을 벗어나 치열하고 건강한 논리싸움을 벌일 수 있다. 그건 그동안 보기 힘들었던 아름다운 장면이 될 것이다. 또 한 가지, 비판은 신문의 권리이며 본령이다. 신문은 좌든 우든 누구도 비판할 수 있다. 특정 신문이 논조에 따라 좌파를 비판한다고 해서 그것 자체를 뭐랄 수는 없다. 다만 문제되는 것은 비논리다.

기자 사회에서 쓰는 표현 가운데 “그거 말(얘기) 된다”는 게 있다. 기삿거리가 된다는 뜻인데, 이 말에는 빨리 보고 판단해야 하는 언론의 속성과 논리를 중시한다는 이중적 함의가 들어 있다. 속보를 추구해야 한다는 핑계로 성급한 일반화와 비논리를 합리화할 수 없다.

필자는 한국에 대해 무슨 무슨 나라니 (부패·도박) 공화국이니, 성급한 낙인찍기식 일반화를 경계하는 편이었지만 이 칼럼 제목은 ‘비논리 나라’라고 붙였다. 그만큼 이 정권 들어 녹색성장 등 뻔뻔스러운 비논리가 횡행하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 다른 시대역행 사례다. 또 몇몇 수구신문들이 한·미 FTA 반대집회에서 경찰이 구타당했다며 “경찰서장이 맞는 나라”라고 보도한 건 지나친 호들갑인 데 비해, 이 정도면 그만큼 성급한 일반화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입력 : 2011-12-20 21:3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