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종교는 자살을 반대한다. 기독교는 “개인이 생명을 마음대로 끊는 것은 신의 권능에 도전하는 것”이란 입장이다. 불교는 오계 중 하나인 불살생계(不殺生戒)에 입각해 자살도 생명경시의 발로로 보고 금지했다.
그러나 항상 예외는 있다. 성경은 “사람이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가르친다. 직접적으로 자살을 언급한 건 아니지만 남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뜻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불교엔 자기 몸을 태워 부처에게 바치는 소신공양(燒身供養)이란 게 있다. 법화경엔 약왕보살이 향유를 몸에 바르고 자신의 몸을 불사른 것이 참된 공양이고 정진이며 높은 보시라고 칭송하는 대목이 나온다. 고승들이 소신공양을 실행한 사례도 드물지 않다. 1960년대 초 베트남에선 전쟁 와중에 정부가 비판적이란 이유로 불교를 탄압하자 틱꽝둑 스님 등 승려 36명이 사이공 거리에서 중인환시 속에 잇따라 분신한 사건이 있었다.
하지만 소신공양의 진정한 의미는 마음속 탐(貪) 진(瞋) 치(痴)의 삼독(三毒) 등 깨달음에 장애가 되는 것들을 불태워버려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문자 그대로 육신을 태운다는 뜻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세속적 해석이라고도 한다.
이런 저런 이유에서 엊그제 4대강 사업 중단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문수 스님의 죽음을 곧장 소신공양으로 연결짓기가 저어되는 게 사실이다. 죽음을 칭찬할 순 없으며 자살은 반종교적이기 때문이다. 1991년 공안정국 속 젊은이들의 잇단 분신자살에 대해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고 매도한 시인 생각도 난다. 그런 만큼 분신이든 소신공양이든 그의 자살을 찬미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하천 제방에서 홀로 자살을 결행한 스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고싶다. “우리의 강들은 살아 있다. 민족의 오랜 생명줄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그 살아 있는 강을 죽었다고 주장하면서 살리겠답시고 거꾸로 죽이는 일을 하고 있다.” 이 글은 운하반대전국교수모임이 지난달 29일 발표한 호소문이다. 이것이 4대강 살리기를 위해 소신공양이란 역설을 선택한 그의 심정 아니었을까. 그의 죽음 앞에서 한 번이라도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생명과 평화와…, 그 숭고한 뜻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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