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사는 팔순 노모와 지난 주말 점심을 같이한 자리에서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북한의 연평도 도발 얘기가 나왔다. 어머니가 말했다. “북한한테 암만 많이 갖다줘도 안 통한다. 잘해줘도 이런 식으로 이용만 하고 배반해 끝내 먹힐 거다.” 평소 북한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던 것에 비해 훨씬 단호한 어조였다. 백주에 대포를 쏴 사람이 죽고 피란민까지 많이 나오지 않았냐는 것이다. 내가 말했다. “아닙니다. 그래도 달래서 평화체제를 관리하는 방법 말고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사회주의라면서 3대째 세습하는, 상궤를 벗어난 집단입니다. 응징, 보복, 강 대 강으론 절대 해결이 안 됩니다.” 덧붙여 겁 줘도 안 통하는 집단이라는 둥 긴 사설을 늘어놓았다. 아무래도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연평도 아이들이 포격으로 불에 타 뼈대만 남은 건물 앞을 지나고 있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그 정도 설명은 주효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건성으로 끄덕였을 뿐 설득되지 않은 듯했다. 이것은 필자의 모친뿐 아니라 북한의 연평도 도발을 접한 대다수 한국인들의 평균적 소회일 거다. 북한은 이번 사건으로 자신이 예측 불가능한 존재임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정권이나 지도자의 행동이 예측 가능하다는 것이 타국엔 상당한 미덕에 속한다. 그러나 이번 일은 북한 정권이 논리가 안 통하며 어떤 행동에 대해 합리적 설명이 어려운 상대임을 많은 사람들에게 재확인시켰다. 

예측 불가능한 존재 과시한 북한

이 때문에 목하 위기 국면에서 “한반도 평화를 찾기 위한 유일한 해법은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이런 주장은 즉각 추궁을 부른다. 도발한 상대를 그대로 놔두고 대화를 해서 무얼 얻을 수 있느냐는. 답은 첫째도, 둘째도 평화다. 즉각 다른 추궁이 이어진다. 그러면 우리만 억울하다. 왜 우리만 계속 접어줘야 하나. 북한은 사과도, 반성도 안 하는데. 

이 추궁에 대해 내가 제시하는 답은 북한 상수(常數)론이다. 상수는 변하지 않는 일정한 값을 가진 수다. 그 반대는 여러 값으로 변할 수 있는 변수(變數)다. 현재 남북관계의 막다른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상수적 성격을 다소나마 인정할 필요가 있다. 주민을 제대로 먹여 살리지도 못하는 북은 상수적 존재이고 남은 고작 거기에 맞춰 움직이는 변수라면 부당하며 불쾌한 대접이라고 억울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북을 상수로 인정하는 건 북이 우월적 존재라서가 아니라 운신의 폭이 매우 좁은, 경직된 체제이기 때문이다. 북보다 남이 우월한 체제라면 인내심을 발휘해 변수를 자청할 수도 있다고 본다. 

국제관계에서 우리에겐 이미 익숙한 상수적 존재가 있다. 바로 미국이다. 미국이 유일 초강대국인 건 세계가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한국엔 특별한 상수로서 군림하고 있다. 미국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서 분명 상수적 위치에 있고 우린 변수다. 이건 쇠고기나 자동차 등 부문별 손익을 따지기 전에 FTA 자체가 이미 불균형한 위치에서 미국화를 열망하는 심리의 소산이란 점에서 그렇다. 이라크 전쟁 파병에서도 한국은 상수인 미국의 심기를 살펴 처신해야 했다. 이런 사례는 부지기수다. 미국은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를 얼마 앞두고 6000억달러 규모의 제2차 양적완화 조치를 했다. 서울 회의의 최대 의제는 환율문제 조율이었고 미국의 조치는 이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었으나 정부는 입도 벙끗 못했다. 

미국이 한국에 상수적 존재인 데는 정치·경제·군사·문화 등 복합적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것도 있고 자발적인 것도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한국이 ‘정상국가’가 되려면 이런 한·미관계의 불균형을 극복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상수 미국에 대한 저항감과 파열음은 계속될 것이다. 

평화비용이 전쟁비용보다 싸

반면 북한 상수론은 북한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방향과 반대로 가고 있다. 정권 들어와 대북 상호주의 원칙이 강조되는 것, 연평도 사건 후 재삼 전 정권의 퍼주기가 문제되는 것이 그렇다. 엊그제 이명박 대통령은 “협박에 못 이긴 굴욕적 평화는 더 큰 화를 부른다”고 했지만 그가 굴욕적 평화가 아니라면 멋진 응징을, 또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궁금하다. 어찌보면 대북 응징론은 편안한 논리다. 북한의 ‘레짐 체인지’ 주장도 솔깃하게 들린다. 이 경우에도 ‘꿈은 이뤄진다’일까. 생각을 바꿔야 한다. 누가 뭐래도 평화비용이 전쟁비용보다 싸게 먹힌다. 그걸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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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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