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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웅 칼럼

그들만의 언어

모스크바 대학 시절 고르바초프는 “진리는 늘 구체적이다”란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이것은 헤겔의 말로, 추상적인 진리란 없으며 진리는 구체적인 상황 아래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뜻이다. 한 번은 <쿠반의 카자크>란 영화를 보고 고르바초프는 매우 분개했다. 영화 속 농민들은 풍성한 식탁에 행복해하고 있으나 시골 콜호스 출신인 그는 영화가 거짓 선전인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신조가 소련 최고지도자가 된 그를 페레스트로이카의 길로 이끌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페레스트로이카에 실패한 것이 우유부단과 과단성 부족 탓이었다는 평가를 받으니 역설적이다. 

말을 잘하는 건 두 가지 점에서 어렵다. 생각을 정리해 발화(發話)하는 단계, 그리고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단계다. 그것이 장삼이사의 일상어라면 별 일 아니다. 그러나 발화자가 정치인, 지도자급이라면 문제가 사뭇 다르다. 정치는 원칙적으로 말로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말은 사려깊고 신뢰성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당위다. 그런데 현실에선 그 반대다. 실상 가장 헷갈리는 언어들로 가득 차 있는 게 지도자들의 말이다. 정치인에게서 담론 수준의 논리적 이론, 주장을 듣기가 갈수록 어렵다. 논리 없는 궤변적 비약과 억설, 동문서답식 논점 흐리기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정치인의 ‘북한 가서 순교’ 운운
 

경향신문DB

보수주의자라는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가 얼마 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안방에서 활개치듯 안전한 서울광장 촛불시위나 앞장서지 말고 삭풍과 탄압이 휘몰아치는 광야(북한)로 가서 정의를 구현하고 순교하라”고 일갈했다. 이 말은 사제단이 “4대강 사업은 결과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정진석 추기경의 발언을 비판한 성명에 대한 비판으로 나왔다. 그는 사제단이 성명 말미에 “추기경이 골수 반공주의자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으니 이는 교회의 불행”이라고 언급한 부분에 대해 이 같은 반응을 보였다. 거의 전적으로 4대강 문제를 다루고 있는 성명에 대한 반응치곤 지나치게 격렬했다. 균형을 잃은 논리비약이자 논점이탈이었다. 

그의 발언은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이 21세기에 3대 세습이 무슨 일이냐고 단 한 번이라도 김씨 왕조를 질책한 적이 있는가. 굶주림을 피해 국경을 넘다 잡혀 정치범수용소에 갇힌 북한 동포를 위해 단 한 번이라도 촛불을 켠 적이 있는가. 북한의 핵무장·천안함 폭침·연평도 포격을 단 한 번이라도 나무란 적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논리비약이든 논점이탈이든 무슨 상관이냐는 식으로 마구 분노를 쏟아내는 느낌마저 준다. 

이 대목에서 인터넷에서 유행한다는 “그럼 소는 누가 키워”란 우스개가 떠오른다. <개그콘서트>의 남녀 토론 코미디에서 남성 우월 주장을 펴는 남자는 논리가 달린다 싶으면 어김없이 “그럼 소는 누가 키워”라며 여자를 윽박지른다. 케케묵은 가부장주의에 빠진 남자에게 여자는 소를 키우고 집안일에 전념해야 할 일꾼 정도로 각인돼 있다. 

이른바 보수 우파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전가의 보도처럼 정부 비판 목소리들을 향해 휘두르는 것이 이런 유의 언어폭력이다.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이 써먹은 바 있는 “북한 가서 살아라”에는 다양한 버전이 존재한다. 조선일보 사설은 그 화려한 변용을 보여준다. 여기엔 남쪽의 민주주의·인권 후퇴를 비판해도, 빈부격차 심화를 우려해도 북한의 억압체제를 들먹이면 입을 닫을 거라고 믿는 심리가 깔려 있다. 그 점에서 “북한 가 정의구현 하라”는 말의 뜬금없음이 “소는 누가 키워”를 외치는 심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상대로 하여금 기가 막히게 함으로써 논점이탈에 성공하는 거다. 

그러나 아시는가. 진리는 구체적인 것이며, 동시에 ‘지금 그리고 여기’부터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이 진실을 외면한 채 북한에 비해 나으니 군소리 말라는 식의 주장은 단세포적 극우논리일 뿐이다. 그런 논리를 발전시키면 모든 내부 비판, 개혁 주장은 불필요하다는 결론을 만난다. 

극우논리의 궤변적 언어폭력 안돼

문학, 음악, 미술 등 예술언어는 때로 그 메시지의 모호함과 다의성이 미덕일 수 있다. 정치에서도 종종 레토릭이 구사되지만 거기엔 엄연한 한계가 있다. 가령 국가 최고지도자의 안보문제 같은 중대 통치행위에서 모호성은 금물이다. 연평도 사태 때 대통령은 확전 문제를 두고 오락가락했다. 구체적이고 명료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지도자의 능력이 절실함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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