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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 쿠바 혁명

1959년 1월1일 잠에서 깨어난 쿠바인들은 바티스타 없는 새해를 맞이했다. …정오 직후 수비대가 항복했고 주민들이 거리로 뛰쳐 나와 올리브색 복장의 수염투성이 남자들을 환영했다. 오후 여섯시쯤 카스트로가 동부의 산티아고를 함락했다. 1월2일 카밀로와 게바라가 각자 부대를 이끌고 300㎞ 떨어진 아바나를 향해 출발했다.(책 ‘체 게바라와 쿠바혁명’에서)

1956년 11월 82명의 게릴라들을 태운 그란마호가 멕시코를 떠나 쿠바로 향한다. 쿠바 상륙전에서 이들은 대부분 정부군의 매복에 걸려 죽거나 체포되고 12명만 살아 남는다.
이들 가운데는 변호사 출신의 젊은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동생 라울, 아르헨티나에서 온 낭만적 사회주의자 체 게바라가 끼어 있었다. 이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악지대로 숨어 들어가 무장혁명의 거점을 건설한다.

당시 쿠바는 토지가 미국 자본과 쿠바인 대지주들에게 집중돼 있었고 절대 다수 국민의 생활은 말할 수 없이 궁핍했다. 정치적으로는 1952년 쿠데타로 집권한 풀헨시오 바티스타의 독재정권이 들어서 있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카스트로의 혁명군은 점차 농민들의 지지를 얻어 세력을 300명으로 불렸다. 그러나 바티스타 정부군 1만2천명에 비하면 왜소하기 짝이 없는 전력이었다. 그럼에도 바티스타를 몰아내고 혁명을 성공한 데는 혁명에 대한 카스트로의 ‘광적인 확신’이 큰 몫을 했다.

32살부터 1976년까지 혁명정부 총리, 이후 국가평의회 의장으로 47년 동안이나 집권해온 카스트로가 동생 라울 국방장관에 일시적으로 의장직을 넘겼다. 그러자 미국은 ‘포스트 카스트로’ 시대에 벌써부터 촉각을 곤두세우는 분위기다. 쿠바에서 90마일 떨어진 미국의 부시 행정부에게 ‘영원한 반미주의자’ 카스트로의 권력 이양은 ‘앓던 이가 빠진 느낌’일 것 같다.

혁명에 대한 열정은 소멸하고 신자유주의의 그늘만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이 시대에 쿠바 혁명 이야기를 하자니 왠지 공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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