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대선을 1년 앞둔 2006년 11월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여론조사를 했다. 후보로 거론되던 정치인 9명에 대해 “정치적 이념 성향에서 진보와 보수 중 어느 쪽에 가깝다고 보는지” 물었다. 가장 진보적인 대선주자로 꼽힌 인물은 누구였을까. 놀라지 마시라. 이명박이었다. 응답자의 54.7%가 그를 진보정치인이라고 간주했다. 응답자들은 김근태, 강금실, 정동영, 손학규, 한명숙보다 이명박이 더 진보적이라고 믿었다(좌우파사전·위즈덤하우스). 나중에 4대강 사업으로 이름만 바꾼 한반도 대운하 사업, 부자 감세, 복지축소를 주요 공약으로 내건 그를 가장 진보적 정치인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이 얘기를 꺼낸 것은 여론조사의 부정확성을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상식과 사회적 통념으로 받아들이는 것들이 크고 작은 오해의 소산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기 위해서다. 그런 것으로 과거사에 대한 인식을 꼽고자 한다. 이것은 역사의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4·16 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와 시민들이 지난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북측광장에서 세월호참사 전면재수사, 책임자·처벌, 검찰개혁, 적폐청산 위한 ‘국민 고소·고발인 대회’를 열고 있다. 4·16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 소속 어머니들이 촛불을 들고 있다. 한겨레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우리는 흔히 ‘나쁜 과거사는 잊어버리는 게 상책’이라거나, ‘미래가 중요한데 언제까지 과거사에 매달릴 거냐’ ‘현재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미래에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진보적 인사들 가운데도 이런 이들이 많다. 이 생각은 절반만 맞다. 나쁜 기억은 잊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문제는 그럴 수 있느냐다. 과거의 나쁜 기억을 잊어버릴 수 있는가.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어려운 일이다. 특히 사회·정치적 의미가 엄청난 비극적 사건을 기억에서 싹 지워버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다 잊어버리자”고 강요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
‘기억하자’와 ‘잊어버리자’ 사이의 싸움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는 소설 ‘어느 수녀를 위한 진혼곡’(1951)에서 명언을 남겼다. “과거는 죽지 않는다. 실은 아직 지나간 것도 아니다(The past is never dead. In fact, it’s not even past).” 이 말은 2008년 미국 대선 때 버락 오바마 후보가 인종문제를 제기하면서 인용해 더욱 유명해졌다. 스토리는 미국 남부가정의 고용주 백인 여성 템플과 흑인 유모 낸시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이다. 두 여자는 과거 창녀 생활을 한 공통점이 있다. 둘은 그런 과거의 끔찍한 환영에 시달리던 중 낸시가 템플의 갓난아이를 질식사시키는 범죄를 저지른다….
검찰이 ‘세월호참사 특별수사단’을 구성해 전면 재수사를 시작하자 언론 반응이 두 갈래다. 하나는 ‘유족들의 눈은 5년 7개월 전 그날에 멈춰져 있다. 꼬리 자르기로 일관했던 수사를 넘어 그간 제기된 의혹을 낱낱이 파헤쳐라’고 주문하는 흐름이다. 다른 하나는 ‘그간 검찰, 국회 국정조사, 세월호 특조위, 감사원 등 5개 기관을 거친 사건에 대한 6번째 수사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라고 묻는다. 수사를 할 만큼 했고 처벌도 충분히 했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세월호 참사 수습과정은 발생 초기부터 지금까지 ‘기억하자’는 쪽과 ‘잊어버리자’는 쪽 사이의 싸움이었다. 이 논란이 검찰 특수단 구성으로 재연되는 형국이다. 그러나 검경의 초동수사는 지금까지 부실·외압·축소 의혹에 쌓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조위(1·2기)-선체조사위-사회적참사특조위는 입을 닫거나 책임을 떠넘기는 관계자들 때문에 한계를 절감했다.
병원 이송까지 4시간 41분이나 지체
참사 당일 맥박이 뛰는 학생을 발견하고도 현장에 있던 헬기가 아닌 배로 옮기는 바람에 병원 이송까지 4시간 41분이나 지체됐고 결국 사망 처리됐다는 사실이 사회적참사특조위에서 최근 밝혀졌다. 아직도 밝혀야 할 진상이나 가려야 할 책임 소재가 많이 남아있다는 얘기다.
세월호 유족 ‘예은아빠’ 유경근씨는 “핵심은 참사 당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밝히는 것”이라며 “핵심과제를 수사하면 나머지는 자연스레 따라오게 돼 있다”고 말한다. 대검 관계자가 했다는 말대로 “더 이상 규명이 필요하지 않을 때까지” 수사할 필요가 있다.
오늘도 일본 우익들은 잘못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은커녕 그것을 부정하고 미화하고 정당화하는데 여념이 없다. 그들 위로 ‘아직도 지겨운 세월호 얘기냐’는 사람들이 겹쳐 보이는 건 어째서일까. 2019-11-13 10:00:00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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