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방울자매가 부른 <마포종점>(1967·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이란 가요가 있다. 내가 ‘노래가 위로다’란 주제의 이 연속 칼럼을 쓰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된 곡이다. 가사부터 살펴보자.
은방울자매의 <마포종점>
밤 깊은 마포종점 갈 곳 없는 밤 전차/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
강 건너 영등포에 불빛만 아련한데/ 돌아오지 않은 사람 기다린들 무엇 하나
첫사랑 떠나간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저 멀리 당인리에 발전소도 잠든 밤/ 하나둘씩 불을 끄고 깊어가는 마포종점
여의도 비행장엔 불빛만 쓸쓸한데/ 돌아오지 않은 사람 생각한들 무엇 하나
궂은비 나리는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마포종점> 가사
<마포종점>은 떠나간 님을 그리워하는 노래다. 그런 사연의 노래는 많다. 그런데 이 노래엔 그 심정을 더욱 애절하게 만드는 몇 가지 장치들이 있다. 첫째는 마포종점이란 장소, 둘째는 비에 젖은 전차다. 그 다음엔 영등포, 당인리 발전소, 여의도 비행장 등 주변 풍경이 효과적인 소도구가 된다.
마포종점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전차의 종점이다. 밤이 되어 이 종점에 비가 내린다. 어디로부턴가 이곳까지 찾아온 화자는 비를 맞고 서있고 전차도 운행이 끝났는지 서있다. 둘의 처지가 비슷하다. 갈 곳이 없는데다, 비를 맞고 서있다는 점에서다. 우두커니 서있는 전차와 사람의 모습. 이걸 작사자는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고 표현했다. 가히 촌철살인의 경지다.
서울 신문로에 전시돼있는 전차
‘흘러간 지명’들도 한강변 마포의 야경을 잘 묘사하고 있다. 당시는 영등포가 한창 개발중이어서 유흥가가 흥청댈 때였다. 이걸 ‘강 건너 영등포’엔 불빛만 아련하다고 했다. 불 꺼져가는 마포종점 부근과 대비된다. 저만치 강북쪽 강변의 당인리 화력발전소도 고요하다. 일제 때 이 발전소가 건설될 당시 지명은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당인리였다. 그 이름을 계속 쓰다가 1969년 서울화력발전소로 바꿨는데 당인리란 그 때 이름이 정겹다. 또 그 시절 여의도엔 비행장이 있었다. 여의도는 1970년 마포대교가 준공되기까지 진짜 하중도(河中島)였다. 배를 타야만 갈 수 있었다. 일제 때 개설된 여의도 공항은 공군기지로 사용되다 1971년 폐쇄되었다. 가사는 이런 서사적 내용도 담고 있다. 지금 들어도 우리의 복고 취향을 일깨우는 구석이 있다.
작사가 정두수는 2013년 낸 책 <노래 따라 삼천리>에서 <마포종점> 작사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사연은 이렇다. 당시 한 젊은 부부가 마포종점 부근에서 사글셋방 신접살림을 차렸다. 그러다 남자가 유학을 떠났다가 과로로 쓰러져 삶을 마감하고 만다. 졸지에 혼자가 된 여자는 옛날에 그랬듯 늦은 밤이면 마포종점에 나가 넋이 나간 듯 남편을 기다린다. 그러다 종적을 감춰버렸다. 마포 종점 부근 마포옥 설렁탕집 주인에게서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영감을 얻어 그날 밤 내처 쓴 게 <마포종점> 가사다.【주1】
1997년 12월 15일, 마포 한강변 어린이공원에 건립된 마포종점 노래비
그런 창작비화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이 노래가 갈 곳 없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노래로 들린다. 개인적 이유가 있어서다. 필자는 2013년 말로 31년 2개월의 기자 생활을 끝내고 정년퇴직했다. 퇴직을 몇 달 앞두고 우연히 술집에서 듣게 된 노래가 <마포종점>이다. 그때부터 이 노래가 내 귓전을 맴돌기 시작한다. 그때까지 은방울자매가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부른 트로트곡이란 거야 알고 있었지만 이상할 정도였다. 왜, 우연히 머릿속에 들어온 노래나 시구가 좀처럼 떠나지 않는 경우들 있지 않나.
그 이유가 퇴직 때문이었던 것 같다. 곧 퇴직하는 필자의 정서에 이 노래 가사가 쏙 들어와 박혔기 때문이다. 구구절절 그랬다. ‘종점’부터 퇴직과 이미지가 겹친다. 종점, 종착역, 노래에 많이 나오는 단어다. 그 종점에 전차가 비를 맞고 서 있는 광경, 그걸 바라보는 내 모습은 또 어떤가. 게다가 전차는 이 노래가 나온 지 1년 뒤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순식간에 노래 화자와 전차, 퇴직을 앞둔 필자 사이에 감정이입, 감정의 결합이 이뤄진 거다.
나는 <마포종점>이 탁월한 감정이입을 했다고 본다. 예술에서 감정이입의 원래 뜻은 자신이 갖고 있는 감정을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불어 넣는 것을 말한다. 가령 절의 종소리는 감정적으로는 중성(中性)이지만, 듣는 이의 내면에 고뇌와 비애가 있을 때는 쓸쓸하고 공허하게 들리는데, 이를 적절히 표현하면 감정이입이 잘 됐다고 한다. 첫대목에서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고 노래함으로써 화자가 전차와 자신이 같은 처지라고 느끼는 것이 바로 감정이입이다. 설마 전차란 물체가 무슨 감정을 가질 리는 없지만, 화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전차를 자신과 동일시한다. 이건 수사법의 의인화이기도 하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 또 그 감정을 혼자만 갖고 있는 게 아니라 때로는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어 한다. 그걸 공감이라고 한다. 슬픔이든 기쁨이든 그렇다. 흔히들 공감하면 기쁨은 배가되고 슬픔은 줄어든다고 한다. 만약 인간에게 공감을 원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노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거다. 인간이 예술에서 찾아낸 독특한 공감 방식이 바로 감정이입이란 것이다.
기본적으로 청각예술인 시와 음악은 특히 감정이입이 잘 이뤄지는 예술이다. 그중에서도 더욱 직접적 감정이입이 이뤄지는 건 음악·노래를 통해서다. 노래가 시보다 더 직접적 감정이입이 되는 것은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따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감정이입은 작자와 노래, 노래와 듣는 사람 사이에서 중층적으로 이뤄진다. 그것을 공감력, 나아가 전염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감정은 때론 지극히 개인적·개별적으로 작동한다. 감정이입이 이뤄지는 과정도 그럴 수 있다. 나를 강렬하게 공감하게 한 건 <마포종점> 첫대목이었다. 첫사랑을 그리워하는 뒷부분을 절절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겠지만. 개인적 경험과 상황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이걸 내 나름의 독창적인 감정이입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노래가 처음 나올 당시에 작사·작곡자를 포함해 누구도 이런 식으로, 감정이입을 통해 자기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나 노래의 메시지에 대한 해석은 산문에 비해 덜 고정적이며, 따라서 주관적 해석이 허용되는 분야다. 30년 이상 출근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갈 곳이 사라졌다. 당혹스럽다. 공황적 상태다. 이미 정해진 퇴직이었기에 수도 없이 각오는 했지만, 날이 가면서 정도가 더 심해진다. 갈 곳이 없는 현실에 대한 낯섦이. 이에 대해서는 나를 포함한 수많은 베이비부머 퇴직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공감할 거다. 따라서 이런 접근을 사회심리학적 비평이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근자에 서유석이 부른 <너 늙어봤냐>란 노래가 장·노년층을 중심으로 큰 반응을 얻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공감하는사람이 많은 거다.
서유석의 <너 늙어봤냐>
너 늙어 봤냐 나는 젊어 봤단다
이제부터 이 순간부터 나는 새 출발이다
삼십년을 일하다가 직장에서 튕겨 나와 길거리로 내몰렸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백수라 부르지
월요일엔 등산 가고 화요일에 기원 가고 수요일엔 당구장에서
주말엔 결혼식장 밤에는 초상집
너 늙어 봤냐 나는 젊어 봤단다
이제부터 이 순간부터 나는 새 출발이다
세상나이 구십살에 돋보기도 안쓰고 보청기도 안 낀다
틀니도 하나 없이 생고기를 씹는다
누가 내게 지팡이를 손에 쥐게 해서 늙은이 노릇하게 하는가
세상은 삼십년간 나를 속였다 (하략)
<너 늙어봤냐>(2014·서유석 작사 작곡) 가사 일부
50대 후반에 은퇴를 하고 보니 노래 가사가 굉장히 공감된다. 특히 ‘너 늙어 봤냐 나는 젊어 봤단다’란 대목이 그렇다. 개인적으로 나는 20년 전 이 말을 처음 접한 적이 있다. 서강대 교수를 지낸 극작가 이근삼씨가 1994년 3월 6일자 동아일보에 ‘퇴장의 문턱에서’란 칼럼을 쓰면서 이 말을 인용했던 거다. 이씨는 이 사회에서 나이를 먹어가면서 갖는 소회를 더듬으며 완전히 늙은이로 취급 당하는 데 섭섭함도 토로한다. 그러면서 “늙는 것도 죄냐. 야, 나도 한때 젊어봤어. 너 늙어봤냐”고 외쳤다는 어떤 외국배우의 대사를 소개했다. 이 말이 매우 인상적이어서 기억하고 있던 차에 한참 후 <너 늙어봤냐> 노래가 나왔다. 이씨는 칼럼을 “사람은 어차피 늙게 마련이다. 어차피 갈 길인데 무엇이 그리 초조한지 모르겠다”는 말로 마무리했다. 이런 말은 했던 그는 2003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아시는가. 이 시대 갈 곳 없는 신세는 은퇴자들 뿐 아니라 젊은이들도 예외가 아니란 사실을. 많은 젊은이들은 지금도 꽉막힌 현실에서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분석한 책 ‘88만원세대’(우석훈·박권일 공저)가 나온 지도 8년이 지났지만 형편은 나아질 기미가 조금도 안 보인다. 따라서 지금의 20대가 88만원세대라는 현실진단은 여전히 유효하다. 88만원세대란 무엇인가. “지금의 20대는 상위 5% 정도만이 ‘한전’과 ‘삼성전자’ 그리고 ‘5급 사무관’과 같은 ‘단단한 직장’을 가질 수 있고, 나머지는 비정규직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비정규직 평균임금 119만원에 20대 급여의 평균비율 74%를 곱하면 88만원 정도가 된다. 평생 88만원에서 119만원 사이의 급여를 받게 될 것이다. 이 88만원세대는 우리나라 여러 세대 중 처음으로 승자독식 게임을 받아들인 세대들이다. 탈출구는 없다.”【주2】
어떻게 20대에게 이런 엄청난 선고가 떨어지게 된 것일까. 이것은 한국이 IMF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경제의 독과점화, 승자독식 체제가 더욱 강화됐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정규직 체제도 깨져 비정규직의 일반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 시스템에서 중소기업, 자영업, 서민, 농민, 20대, 지방기업 등 대형화 전략을 취할 수 없는 경제주체들은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태로 내몰리게 된다. 예전에 했던 “대학 못 가면 장사나 해라”도 안 통한다. 유통에서도 독과점화, 프랜차이징 체제 강화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개별 자영업자들은 급속히 몰락하고 있다. 여기에다 빠른 속도로 세대간 불균형이 진행되고 있다. 대다수의 20대는 여기서도 약자다. 이런 경향은 계속 강화될 것이다.
이런 우울한 얘기들이 담겨있는 ‘88만원세대’ 책이 나온 건 2007년으로 노무현 정권 말기였다. 한데 뒤를 이은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는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얼마나 가속화했던가. 그것까지 추가한다면 현실도 전망도 암담할 뿐이다. 직업 안정성이 취약한데다 세대간 착취에 시달리고 있는 젊은 20대(얼마 후 그 나이가 될 10대)가 가야 할 곳은 도대체 어디인가.
<싸구려 커피>가 실린 장기하 EP 재킷
88만원세대란 말이 사회적으로 적잖이 회자되기 시작할 즈음인 2008년 장기하가 <싸구려 커피>(장기하 작사 작곡)란 곡을 내놓았다.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눅눅한 비닐 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 붙었다 떨어진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어/ 바퀴벌레 한마리쯤 쓱 지나가도
무거운 내일 아침엔/ 다만 그저 약간의 기침이 멈출 생각을 않는다
축축한 이불을 갠다/ 삐걱대는 문을 열고 밖에 나가본다
아직 덜갠 하늘이 너무 가까워 숨쉬기가/ 쉽지를 않다 수만번 본 것만 같다
어지러워 쓰러질 정도로 익숙하기만 하다/ 남은 것도 없이 텅빈 나를 잠근다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쩍하고 달라 붙었다가 떨어진다
뭐 한 몇 년간 세숫대야에 고여있는 물 마냥/ 그냥 완전히 썩어가지고 이거는 뭐 감각이 없어
비가 내리면 처마 밑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멍하니 그냥 가만히 보다보면은
이거는 뭔가 아니다 싶어/ 비가 그쳐도 희끄므레죽죽한 저게
하늘이라고 머리 위를 뒤덮고 있는 건지 (하략)
<싸구려 커피> 가사 일부
이 노래 가사를 살펴보면 주인공은 러시아 문학사 속 ‘잉여인간’의 전형으로 평가되는 ‘오블로모프’의 분위기를 풍긴다. 곤차로프의 동명 소설 주인공 오블로모프는 온종일 침대에서만 뒹굴며 무위도식의 나날을 보내는 독신 귀족이다. 19세기 중엽, 농노제하의 러시아 사회나 지식인 귀족 계급의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생각만큼은 멀쩡하다. 농노제의 문제점에 대해서나 남녀의 사랑, 우정, 사회, 국가 등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갖고 있지만 안일과 무위를 끝내 벗어나지 못한다.
러시아 영화 오블로모프의 생애(1979) 한 장면
<싸구려 커피>가 반응을 얻자 주류 언론과 비평은 그것을 ‘88만원세대의 송가’란 관점과 연관지었다. 이 노래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가난한 20대의 무기력함을 해학적인 창법으로 승화시키며 ‘싸구려 커피’와 ‘발이 쩍 붙었다 떨어지는 장판’에 빗댔다는 평가를 받았다. 왜 불안하며 무기력한지는 적시하지 않았지만. 하지만 장기하 본인을 비롯한 20대 당사자 대부분은 그런 식의 해석을 거부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것은 ‘88만원세대’라는 용어에 대한 거부감과 위트와 유머를 ‘정치적으로’ 확대해석하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이 ‘쿨’하게 결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주3】
이런 태도는 젊은 층이 즐겨 쓰는 ‘쩐다’란 말과 통하는 게 아닌가 한다. “우리 보고 88만원세대라니, 쩐다”, 이런 식으로. 그러나 가령 장기하가 서울대생이며 경제적 어려움이 없이 자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해서 그게 이 노래의 사회적 의미를 재고해야 할 이유는 아니라고 본다. 그보다는 이 노래의 사회비판적이면서 자학개그적인 면이 동시대 청년들의 공감을 받았다는 게 ‘88만원세대’적 노래임을 보여준다고 할까.
설운도가 부른 <나침반>(1984·김상길 작사, 이유림 작곡)을 들어보자.
종로로 갈까요 명동으로 갈까요/ 차라리 청량리로 떠날까요
많은 사람 오고 가는 을지로에서/ 떠나버린 그 사람을 찾고 있어요
아 이쪽 저쪽 사방팔방 둘러보아도/ 어쩌다 닮은 사람 한 두 명씩 오고 갈 뿐
아 내가 찾는 그 사람은 어디 있나요/ 아무리 찾아봐도 그 사람은 간 곳이 없네
미아리로 갈까요 영등포로 갈까요/ 을지로 길모퉁이에 나는 서있네
<나침반> 가사
이 노래에서도 화자가 찾는 그 사람은 필시 사랑하는 연인이겠지만, 감정이입을 달리 하게 되면 마음이 갈 곳을 잃어 길 모퉁이에 우두커니 서 있는 도시인의 자화상이 될 수도 있겠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갈 곳 없는 신세들을 수없이 양산하는 사회이므로.
【주1】정두수, 노래 따라 삼천리(미래를소유한사람들, 2013) 254쪽
【주2】우석훈·박권일, 88만원세대(레디앙, 2007) 표지날개 설명
【주3】김창남 엮음, 대중음악의 이해(한울, 2012) 대중음악과 세대 168~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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