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기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게 인간 본성이며 인지상정이다. 가수 김종환은 ‘존재의 이유’에서 “네가 있다는 것이 나를 존재하게 해”라고 노래했지만, 어찌됐든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런저런 자기 존재의 이유를 고민하고 확인한다.
존재감이란 말도 자주 쓴다. 사람, 사물 따위가 실제로 있다고 느끼는 것이란 뜻인데, 언제부턴가 ‘미친’이란 수식어를 붙인 ‘미친 존재감’도 통용되고 있다. 방송 따위에서 비중있는 역할이 아닌데도 외모, 스타일 등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고 한다.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얼마나 존재감에 목마른 세태길래 그런 표현이 나왔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미쳤어도 존재감만 드러내면 족하다?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이란 원훈이 새겨진 국정원 원훈석
한데 직업적 특성상 이 인간의 본성을 억눌러야 하는 특수한 존재들이 있다. 정보기관원들이다. 정보기관은 국가안보와 관련된 정보수집 및 범죄수사를 담당한다. 일의 성격이 매우 중요하고 비밀스럽다. 그들의 존재 이유가 바로 국가안보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쪽 종사자들은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음지에서 보람을 찾는다.
실제로 우리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의 부훈은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였다. 국가정보원으로 개칭한 뒤에는 원훈이 한때 ‘정보는 국력이다’로 바뀌었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으로 다시 고쳤다. 모토 속의 ‘음지’도 ‘무명’도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일해야 하는 그들의 숙명을 되새기는 것이었다. 그 점에서 국정원과 존재감은 상극적이다.
그런 국정원이 달라졌다. 요즘은 음지와 무명의 가치를 던져버리고 양지로 나오기로 작정한 것 같다. 남재준 국정원장이 국회 정보위에서 “야당이 자꾸 공격하니까 국정원 명예를 위해서”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했다고 한 게 지난 여름이다. 10월엔 북한 내부 사정들을 시시콜콜 브리핑하고 군사위협 가능성을 강조했다. 국회 정보위에서 이렇게 많은 고급정보가 쏟아진 건 이례적이었다.
엊그제 북한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 실각설을 공개한 것도 그렇다. 이날은 여야가 국정원 개혁특위 합의 논의를 진행하는 상황이었다. 시점이 묘하다. 개혁 도마에 오른 국정원이 존재감을 부각시키기 위해 그런 것 아니냐는 지적들이 나온다. 다 대선개입이란 원죄에서 비롯됐다.
김철웅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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