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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붉은 청어

논리적 오류 가운데 ‘레드 헤링’이란 게 있다. 직역하면 붉은 청어다. 청어를 훈제하면 지독한 냄새가 나는데, 옛날 영국에선 여우 사냥개를 훈련하는 데 이걸 사용했다. 사냥개가 강한 청어 냄새 속에서도 사냥감을 놓치지 않도록 후각을 단련시키기 위함이었다.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 논쟁을 벌일 때 엉뚱한 데로 상대의 주의를 돌려 논점을 흐리는 수단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실제로 논쟁에서 까딱 잘못해 붉은 청어 냄새를 좇아가다 상대의 의도에 말려 핵심을 놓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원래 주제에서 벗어난 얘기를 슬쩍 끼워넣을 때다. 가령 월급이 적다고 불평을 하는데 부모님이 “내가 네 나이 때는 한 달에 10만원도 못 받았다”고 하면 얘기는 논점을 벗어나게 된다.

국회의원 갑이 을에게 묻는다. “왜 낙태 금지에 찬성하지 않습니까. 생명을 존중하는 정신이 없습니까.” 여기에 국회의원 을이 “그러는 당신은 왜 무분별한 총기 사용으로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는데도 총기 규제를 지지하지 않느냐”고 역공을 한다면 이게 ‘레드 헤링’이 된다. 을의 관심사도 중요한 것이지만 갑의 질문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지난 22일 천주교 정의구현 전주교구 사제단 시국미사에서 박창신 원로신부가 강론하고 있다. 박 신부는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했는데,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일부 발언을 문제 삼아 종북공세에 나섰다. 논점을 흐리는 ‘레드 헤링’ 수법이다.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지는 이 정권의 종북몰이가 이번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로 방향을 잡았다. 박창신 원로신부가 한 북방한계선(NLL) 발언이 “북한의 논리를 대변했다”(정홍원 총리)는 것이다. 청와대, 여당, 조중동 할 것 없이 융단폭격을 가하는 게 꼭 ‘울고 싶은데 뺨 맞은’ 반응들인 것 같다.

그런데 박 신부의 문제 발언이란 것이 ‘레드 헤링’적 성격이 강해 보인다. 진짜 중요한 내용은 국가기관의 대선개입에 따른 박근혜 대통령 사퇴 주장인데도, 북한의 연평도 포격을 정당화했다는 쪽으로 민첩하게 논점을 이탈했다. 이렇게 해서 ‘종북구현 사제단’ 규탄으로 방향을 바꾸는 게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거다.

이런 종북몰이 노하우는 어제오늘 습득된 게 아니다. 군사독재 때부터 체질화한 색깔론 의존은 관성적 측면이 강하다. 냉전 반공시대에 가장 손쉽게 반대자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었던 것이 색깔론이었다. 아직도 그런 편의주의적 비논리에 의존해야 하는 집권세력은 굉장히 게으른 집단이란 생각도 든다. 이 시대는 또 얼마나 많은 종북주의자를 양산할 것인가.



김철웅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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