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 가리(1914~1980)는 복잡한 생을 뜨겁게 살다 간 작가다. ‘복잡한 생’은 정체성부터 그렇다. 모스크바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유태인 차별을 피해 13세에 프랑스에 정착했다. 그러고도 프랑스어에 뛰어나 작가가 됐다. 작가면서 외교관으로 여러 나라에서 근무했다. 42세에 볼리비아 주재 프랑스 영사로 있으면서 장편 <하늘의 뿌리>로 권위있는 공쿠르상을 수상했다.
1975년 그는 <자기 앞의 생>을 출간해 다시 공쿠르상을 받는다. 이번엔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였다. 공쿠르상은 한 번 수상한 사람에게는 다시 상을 안 주는데 가리는 유일하게 두 번 받은 작가가 됐다. 그만큼 두 작가가 동일인임을 철저히 숨겼기 때문이다. 가리가 아자르였다는 사실은 그가 권총자살로 파란많은 삶을 마감한 뒤에야 밝혀진다. 가리가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유서 같은 글에 이런 말을 남겼다. “한바탕 잘 놀았소. 고마웠소. 그럼 안녕히.”
로맹 가리. 한 번 공쿠르상을 수상한 뒤 이십년만에 에밀 아자르란 필명으로 다시 이 상을 받은, 특이한 인생을 살다 간 작가다.
사람들이 익명으로 글을 쓰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1980년대 밀리언셀러 <김형욱 회고록>의 출간 당시 필자는 ‘박사월’로 돼 있었다. 박사월은 박정희 시절 망명해 미국에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을 만나 회고록을 대필한 김경재 전 의원의 필명이다. 그 시절 박정희의 치부를 까발린 회고록을 써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부담이었을지 짐작된다.
‘해리 포터’ 작가 조앤 롤링이 몇 달 전 낸 추리소설 <뻐꾸기의 외침>은 필자를 민간 안보 전문가 ‘로버트 갤브레이스’로 내걸었다. 책은 두 달간 약 1500부 팔리는 정도였다. 그러다 실제 작가가 롤링임이 밝혀지자 단번에 품절사태가 빚어졌다.
일본에선 요즘 ‘원전 마피아들의 비리를 고발한 소설을 쓴 일본 관리가 대체 누구냐’는 궁금증이 번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원발(原發) 화이트아웃>이란 이 소설은 출간 1개월여 만에 6만5000부 넘게 팔렸는데, 작가는 와카스기 레쓰란 필명의 현역 관료로만 알려져 있다. 소설 형식을 빌렸지만 묘사가 매우 생생해 긴장한 관가엔 색출 움직임도 있다고 한다. 작가는 신문 익명 인터뷰에서 “신원을 밝히면 그걸로 아웃”이라며 “되도록 오래 부처 내에 버티면서 계속 목소리를 내고 싶다”고 말했다. 익명이라 해도 이렇게 ‘공력이 대단한’ 내부고발이라면 박수받을 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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