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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좋았던 옛 시절

해묵은 박정희 공과론이 10·26 34주기를 맞아 재연되고 있다. 말이 공과론이지, 찬양론 일색이다. 대표적인 게 손병두씨의 추도사다. “서민들은 간첩이 날뛰는 세상보다는 차라리 유신시대가 더 좋았다고 부르짖습니다.” 아주 대놓고 선명하게 찬가를 부르고 있다. 이것도 정치적 소신일 수는 있다.

사람 취향은 가지가지다. 성적 취향으로 말하자면 동성애도 있다. 이것도 존중하는 게 민주주의다. 그래야 모두가 자유롭게 다양성을 추구하며 살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소신의 표출에는 소수자의 성적 취향을 존중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가 있다. 바로 보편성의 문제다. 손씨가 1970년대 7년간 지속된 유신시대가 더 좋았다고 주장하려면 그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주장인지를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안 그러면 비논리적이고 독선적인 궤변이란 소리를 듣게 된다.

 

 ‘전국에 비상계엄 선포’라는 제목 아래 박정희 대통령의 10월유신 선언을 보도한 1972년 10월18일자 경향신문 1면



미국 문헌학자 오토 베트만이 쓴 책 <좋았던 옛 시절-그것은 끔찍했다>는 흘러간 과거에 대한 향수와 같은 긍정적인 생각들을 통렬히 깨부순다. 저자는 옛 시절은 ‘한줌의 특권층’에게만 좋은 것이었을 뿐, 농부와 노동자와 같은 ‘장삼이사’에게는 참으로 끔찍한 것이었다고 썼다. 책에서 ‘옛 시절’은 미국 남북전쟁(1861∼1865년) 종전부터 1900년대 초반 사이로, 미국인들이 ‘좋았던 옛 시절’을 얘기할 때 가장 자주 언급하는 시기다. 그러나 그는 생생한 삽화와 사진을 동원해 환경·주거·노동·식품·보건 등 당시 생활 전반의 수준이 얼마나 참혹한 것이었는지를 실증한다.

 

 

 

[장도리]2013년 10월 11일 /경향신문DB



특정 지도자의 시대나 업적을 평가할 때 매우 중시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 보편성이다. 보편성을 상실할 때 역사는 갈지자 걸음을 한다. 즉 거침없이 왜곡의 길을 간다. 유신시대를 ‘좋았던 옛 시절’로 믿는 것은 그 시절 장삼이사가 겪어야 했던 수많은 고통을 망각이란 이름의 카펫으로 덮어버린 결과다. 추악한 과거가 그렇게 덮여버리면 펼쳐지는 건 푸른 하늘 아래 드넓은 초원, 목가적 풍경뿐이다.

일본 극우들은 지금도 일본군 위안부 등 과거사를 미화·정당화하는 데 여념이 없다. 22년간 루마니아를 철권통치한 차우셰스쿠가 민중봉기로 처형된 지 24년이 지났는데도 “그 시절이 좋았다”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다 더러운 과거를 망각이란 카펫으로 덮어버린 뒤 자기식의 노스탤지어를 뒤집어쓴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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