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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 호모스크립투스

인간은 기록하는 동물이다. 그건 본능 같다. 그래서 호모사피엔스(지혜 있는 사람)는 호모루덴스(유희인), 호모로퀜스(언어인)이자 ‘호모스크립투스’, 즉 기록하는 인간이다. 원시시대엔 동굴 암벽에 그림을 그렸고, 종이에 기록을 남겼다. 종이 자체가 기록에 대한 인간 욕망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디지털 시대엔 사이버 공간이 주요 기록 장소다.

왜 기록하는가. ‘본능이니까’라고 답하면 순환논법이 된다. ‘뭔가를 남기고 싶어서’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면 속 시원한 답을 찾기 어렵다. 모든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기록을 하며 살지만, 왜 기록하는지에 대해선 선뜻 답이 안 나온다. 질문이 철학적이어선가.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오마하 해변에서 카파가 찍은 사진은 초점이 안 맞고 흔들렸다. 그러나 긴박함이 전달됐다. 그때, 카파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기록을 해 무엇을 얻는가’로 질문을 바꾸면 몇 가지 구체적 답이 나온다. 얼마 전 SBS가 방영한 다큐멘터리 <기록의 시대, 호모스크립투스>에 출연한 사이클 동호회원들은 “기록은 소통의 도구”라고 했다. 사이클을 타며 겪는 일과 느낌을 스마트폰 기록을 통해 실시간 공유함으로써다. 이 프로에는 교수를 지낸 77세 ‘기록광’도 나왔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거의 모든 일들을 기록해왔다. 언제 처음 운동화를 신었는지, 바나나를 먹었는지도 찾아보면 다 나온단다. 그가 이러는 이유는 삶의 기록이 곧 역사가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진도 중요한 기록이다. 다만 표현의 도구가 카메라인 점이 특별나다. 어떤 사진 기록자가 이런 말을 했다. “당신 사진이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다면, 충분히 다가가지 않은 것이다.” 전설적 사진기자 로버트 카파(1913~1954)가 한 말이다. 기록으로서의 사진에 대한 자기 철학이 응축돼 있다. 이 말대로 그는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를 누비며 현장을 카메라로 기록했다. 최대한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 인간의 공포를 필름에 담았다. 이 때문에 초점이 잘 안 맞고 흔들린 사진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자정신’을 뜻하는 카파이즘을 더욱 생생하게 보여줄 뿐이었다. 그는 베트남에서 전쟁 취재를 하다 지뢰를 밟아 그다운 최후를 맞는다. ‘라이프’지는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종군한 카파가 찍은 사진을 실으며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란 설명을 달았다. 그때,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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