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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 저격수

저격수 하면 필자에게 떠오르는 것이 ‘저격수의 골목’이다. 1992년 유고연방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내전이 발발하자 세르비아계 민병대는 수도 사라예보를 포위한 채 이슬람을 믿는 보스니아계 등을 공격했다. 이때 악명을 떨친 길이 있다. 사라예보 공업지대와 구시가 문화유적지를 잇는 이 길은 외신기자들 사이에서 ‘용(龍)의 거리’란 본명보다는 ‘스나이퍼 앨리’로 불렸다. 문자 그대로 ‘저격수의 골목’이다. 보스니아어로도 ‘스나이페르스카 알레야’로 같은 뜻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희생됐다. 세르비아계 저격수들은 인근 고층 빌딩이나 산악지대에 숨어 지나가는 시민들을 조준 사격했다. 3년여 내전 동안 이곳에서 자행된 저격으로 1030명이 다쳤고, 225명이 숨졌으며 이 중 60명이 어린이란 통계도 있다. ‘저격수 주의’란 경고문이 곳곳에 붙어있을 정도로 공포스러운 골목이었다.

내전 후 저격수의 골목을 걷고 있는 사라예보 시민들. 총탄 자국이 난 벽엔 '저격수 조심(Pazi Snajper)'이란 경고가 곳곳에 적혀 있다.

무차별 사격과 구별되는 저격은 ‘특정 대상을 노려서 치거나 총을 쏘는 행위’다. 좀 보충하면 정밀 조준으로 총알 단 한방에 적을 제거해버린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베트남전 때 미군은 병사 1인당 20만발을 쏴 적군 1명을 사살하는 수준이었지만, 저격수들이 소비한 탄환은 평균 1.3발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고도로 훈련된 사격 달인이 저격수로 기용된다. 저격수란 말은 은유적으로도 많이 사용된다. 가령 재벌에 대한 예리한 비판을 멈추지 않는 심상정 의원은 재벌 저격수로 불린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나섰던 폴 라이언은 오바마 저격수로 유명세를 탔다.

 

         대선 TV토론에서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왼쪽)가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에게 맹공을 퍼붓고 있다.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선 후보의 이름 앞에 갑자기 저격수란 수식어가 자연스레 붙고 있다. 두말할 것 없이 엊그제 TV토론에서 ‘박근혜 저격수’ 역할을 톡톡히 했기 때문이다.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온 거다. 반드시 떨어뜨릴 것이다” “다카키 마사오” “대대로 나라 주권 팔아먹은 사람들” “뿌리는 속일 수 없다” 등 그가 종횡으로 구사한 언어는 가히 고도로 훈련된 스나이퍼를 연상케 했다. 스나이퍼란 말의 원래 뜻이 높고 빨리 나는 도요새(스나이프)를 사냥하는 명사수라던가. 이 활약에 대한 반응은 극과 극이다. 모처럼 후련하다거나, 예의를 잃어 거부감을 준다거나…. 하지만 상당수 사람들에게 어떤 카타르시스를 준 것만큼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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