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 맨>은 형제애를 그린 괜찮은 영화다. 주인공은 자폐증을 앓고 있는 형과 이기적인 동생이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힘든 관계지만 부친이 남긴 유산 문제로 오랜만에 만나 함께 여행을 하며 마음을 열어간다. 동생 찰리는 형 레이먼이 어렸을 적 자기 기억 속의 ‘레인 맨’임을 알게 되고 뜨거운 형제애를 깨닫는다. 찰리는 진정으로 형의 보호자가 되기를 원하지만 결국 아쉬움 속에 형을 병원으로 돌려보낸다.
때론 현실이 이런 영화보다, 소설보다 더 슬프다. 다름 아닌 현실과 허구의 차이 탓이다. 허구가 아무리 촘촘하게 스토리를 직조한들 생생하게 다가오는 현실을 능가할 수 없다. 그래서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왕왕 영화보다 훨씬 감동적이고 훨씬 잔인하다.
영화 <레인 맨> (1988) 포스터. 자폐증 형(왼쪽, 더스틴 호프만)과 이기적인 동생(톰 크루즈)이 형제애를 느껴가는 과정을 그렸다. 하지만 영화보다 훨씬 감동적이고 그래서 처절한 가족애가 펼쳐지는 곳이 현실 세계이다.
지난 29일 저녁 경기도 파주의 한 아파트에서 불이 나 뇌병변장애 1급인 남동생(11·초등 5)과 누나(13·중1)가 연기에 질식해 중태에 빠졌다. 둘은 맞벌이를 하는 부모가 집을 비운 사이 불이 나자 안방으로 피한 채 변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현장을 조사한 소방당국은 누나가 동생을 보호하려다 빠져나오지 못한 것으로 추정했다. 누나는 평소 동생을 끔찍이도 보살펴왔다고 한다. 동생을 돌보겠다며 중학교도 동생이 다니는 특수학교를 지원했다. 동생 대소변 처리도 도맡았다. 누나의 담임교사는 “항상 누나가 쉬는 시간마다 가서 동생이 잘 있는지 보고, 등하교 때도 손을 꼭 잡고 다녔다”고 말했다.
아이들의 처지는 불행의 조건과 요소들을 참 골고루도 갖췄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파트는 은행 빚 때문에 최근 경매로 팔려 지난달 말까지 비워줘야 할 형편이었다. 부모가 월세로라도 이사할 집을 구하러 다니는 사이 사고가 덮쳤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 맞는 것 같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톨스토이가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에 써 종종 인용되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일들을 한꺼번에 당하는 사람들을 보면 톨스토이의 말이 절반의 진실 같기도 하다. 도리어 이 양극화 시대엔 “불행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행복한 가정은 그 이유가 제각각”이란 나보코프의 패러디가 더 와닿는다.
부디 이 남매가 일어나 삶을 꿋꿋하게 이어가기를 소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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