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은 자주 주어가 생략된다. 그래서 국어 문장을 영어로 옮기려면 생략된 주어를 찾아내 밝혀줘야 하는 경우가 많다. 명지대 김정운 교수는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어려서부터 미국에서 자란 교포가 한국말을 하면, 뭔가 어색하다. 모든 문장에 반드시 주어를 쓰기 때문이다. 서양의 모든 언어는 주어가 분명하다. 모든 문장에는 반드시 주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어에는 주어가 대부분 생략된다. 이야기하는 맥락으로 행동의 주체를 추정할 뿐이다. 그래서 오해가 많다.”
이명박 대통령은 당내 갈등도 모두 남의 나라 이야기인 듯 주어를 생략한 채 말하는 탁월한 능력이 거의 신기에 가깝다는 평가를 듣는다.
그러나 주어가 국어의 필수적 요소가 아니라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며, 비록 겉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원칙적으로 모든 문장에 있어야 하는 필수요소라고 봐야 한다. 이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신문에는 주어, 동사를 생략한 문장이 많다. <신문 문장 분석(김세중 지음)>에 따르면 “문장 속의 어떤 성분을 생략해도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싶으면 여지없이 생략하는 것은 모든 사설, 칼럼, 기사를 일관하는 원리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압축 전달을 중시하는 저널리즘의 생리 탓이라 할 수 있다.
정치인들은 또 다른 ‘정치적’ 이유에서 주어 등을 생략한 모호어법을 쓰곤 하는데, 대표적 사례가 이명박 대통령이다. 올 초 국정연설에서 “저는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서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사과했다. 그런데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 구체적 내용이 없었다. 야당은 사과 같지도 않은 사과에, 이제는 주어에 이어 목적어마저 생략하는 것이냐고 공격했다. 그가 2000년 광운대 강연에서 BBK 설립 사실을 언급한 동영상은 주어생략법의 고전에 속한다. 2007년 이명박 대통령 후보 선대위 대변인 시절의 나경원 의원은 “(이 후보가) BBK라고 한 것은 맞지만 (‘내가’라는) 주어가 없다”고 잡아떼기도 했다.
MBC 사측이 지난주 열린 언론중재위 조정심리에서 권재홍 보도본부장의 부상 소식을 전한 지난달 17일 뉴스에 대해 MBC 기자회의 정정보도 요구를 거부했다고 한다. ‘누가 위해를 가했는지 주체를 명시하지 않았다’는 게 이유다. 보도 내용은 누가 봐도 노조원들이 폭력을 행사한 탓임을 알 수 있도록 만들어놓고 “주어가 없지 않으냐”고 우기는 꼴이다. 과연 MB의 낙하산 사장 체제에서 짜낸 논리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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