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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 쇠고기와 국민정서

언제부터인지 국민정서란 말이 부정적인 맥락으로 사용되곤 한다. 가령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자 때인 2008년 신년사에서 “선진화를 법과 질서를 지키는 것에서 시작하자. …‘떼법’이니 ‘정서법’이니 하는 말도 우리 사전에서 지워버리자”며 법치를 강조했다. 그 후 그는 수도 없이 법치를 강조했고, ‘떼법’을 개탄했다. 그가 말한 정서법은 국민정서법을 줄인 말이다. 국민정서를 빙자한, 감성적 규범을 들먹이지 말고 진짜 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28일 저녁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한국대학생연합 주최로 열린 ‘미국산 쇠고기 수입중단 촉구 촛불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촛불을 들고 있다. 집권세력 일부는 미국 쇠고기 수입에  대한 여론 악화를 오도된 국민정서와 떼법으로 몰아가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말인즉슨 옳다. 국민정서란 말은 다분히 추상적이다. 이 말을 쓰는 사람에 따라 뜻이 달라질 여지가 크다. 정치인들이 “국민정서를 감안하면…”이라거나 “국민정서상 맞지 않는 행위…” 운운하면 그건 십중팔구 아전인수 격 주장을 펴기 위한 포석이라고 보면 된다. 국민, 나아가 국민정서를 들먹이면 일단 그럴듯한 명분을 선점할 수 있다는 생각이리라. 이래저래 국민정서란 말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용법으로 앞으로도 생명력을 유지하지 않을까 한다.

이렇게 국민정서법이 법치를 무력화하는, ‘떼법’과 동일시되는 현상은 마땅히 경계해야 한다. 다만 떼법이란 말이 “법을 무시하고 생떼를 쓰는 억지주장, 또는 떼거리로 불법시위를 하는 행위”라는 뜻인 경우에 한해서다. 왜냐하면 현실에선 법치만능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정당한 주장을 떼법으로 몰아붙이는 경우를 왕왕 보기 때문이다. 2009년 용산참사를 공권력과 법치를 유린한 떼법으로 간주하는 시각 같은 것이다. 게다가 스스로 수도 없이 불법을 저질러온 이명박 정권에서 국민정서법이니, 떼법 얘기를 듣는 국민은 몹시 불편하다.

미국에서 광우병 소가 발생하자 롯데마트는 여러 경쟁사들과 달리 미국산 쇠고기 판매를 중단하고 있다. 마트 관계자는 그 이유를 “소비자의 먹거리 불안의식이 높은 데다 안전에 문제가 없다고 해도 광우병에 대한 국민정서를 무시할 수 없다”고 밝혔다고 한다. 누군지 몰라도 이 관계자가 매우 핵심을 찌르는 말을 했다고 본다. 아무 데나 국민, 국민정서를 갖다 붙이는 것은 삼가는 게 좋다. 그러나 국민건강을 말하는 데 있어 국민정서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이 점을 직시하지 않으니까 자꾸 미국 편에서 온갖 변명을 늘어놓게 되고 그것이 또다시 국민정서를 해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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