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히 알려진 독일의 본 회퍼 목사 얘기로 시작하는 게 낫겠다. 그는 “미친 운전자가 행인들을 치고 질주할 때 목사로서 사상자를 돌보는 것보다는 핸들을 빼앗아야 한다”는 신조로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했다가 발각돼 처형당한 인물이다.
<만일 미친 사람이 인도 위로 차를 몰고 달린다면 나는 목사로 죽은 자를 장사하고 가정을 위로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내가 만일 이 장소에 있다면 나는 뛰어 덤벼들어서 그 미친 운전사가 운전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합니다. -본 회퍼(1906~1945)>
본 회퍼 목사가 생각난 건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가 엊그제 기자회견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을 향해 한 말을 듣고서다. 한 대표는 “난폭 음주운전으로 인명사고가 났다면, 운전자뿐 아니라 조수석에 앉아 있던 사람도 법적 책임이 있다”며 “박 위원장은 조수석에서 침묵으로 이명박 정부를 도운 만큼 모르는 척, 아닌 척 숨지 말라”고 공격했다. 내 연상은 일견 뜬금없다. 여러가지로 상황이 다르니까. 본 회퍼가 말한 미친 운전자와 한 대표가 말한 난폭 음주운전자를 동일시할 수 없다. 또 같은 정당에 속해 조수석에 앉아 있던 사람, 박근혜와 미치광이 히틀러로부터 핸들을 빼앗아야 했던 본 회퍼는 처지가 180도 다르다.
그러나 같은 날 박 위원장이 한 라디오 연설을 들어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박 위원장은 “저와 새누리당은 잘못된 과거와는 깨끗이 단절하고 미래로 나아가겠다”고 말했다. 친박 쪽 핵심 관계자는 “이명박 대통령의 잘못된 리더십, 돈봉투 등 구태, 거수기 정치, 공천 학살, 약속을 뒤집는 관행 등과의 단절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야당이 주장하는 이명박 정권 심판론을 차단키 위한 이명박과의 단절인 셈이다.
이 정권 초기 ‘ABR’, 즉 ‘노무현이 하던 것만 빼곤 뭐든지’란 말이 유행했다. 필자는 차기 대선에선 ‘ABL(이명박 빼곤 뭐든지)’이 등장할지 모른다고 예견한 적이 있다. 박근혜가 말하는 단절이 바로 ‘ABL’과 다를 게 없다.
그런데 그 단절이란 게 호락호락할까. 절대 아니다. 구(舊) 한나라당이 스스로 이를 입증했다. 정권의 비리는 운전자건 조수석에 있었건 공동책임이다. 그런데 박 위원장은 시종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며 딴청을 부린다. 당명, 로고, 상징색을 바꾼다며 요란을 떨더니 야당이 추천한 조용환 헌법재판관 후보자 선출을 끝내 거부했다. 시대착오적 색깔론을 동원한 사상검증의 결과였다. 당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고, 조수석에 있던 사람은 다르다고 노래를 부르면 무엇하나. 금세 들통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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