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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 SNS와 낭만 


낭만이란 말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낭만의 사전적 의미와는 별개로, 이 추상어가 갖는 이미지나 개념의 폭이 상당히 넓다는 말이다. ‘낭만적’이란 말에 드물게는 브루크너의 4번 교향곡 ‘로만티쉬’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다. 최백호는 이렇게 낭만을 노래한다.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리를 들어보렴/…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마는/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꼭 낭만을 노래한 가수가 아니더라도 많은 이들에게 낭만은 ‘다시 못올 것’ 같은 과거형으로 다가온다. 낭만에는 상실감을 동반한 아련한 추억 같은 무엇이 묻어 있다. 낭만은 어느 편이냐 하면, 대체로 좋은 것이다. 하지만 잃어버려서, 또는 잃고 있어 안타까운 것이다. 
 

SNS 규제 그래픽 출처 : 경향DB


객쩍은 낭만 생각이 난 건 어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끊고 살아봤다는 20대 학생에 관한 기사를 읽고서다. 이 미국 젊은이는 페이스북·트위터는 물론 휴대전화와 문자메시지, e메일도 끊었다. 너나 없이 SNS에 매달려 시간을 쏟는 게 우스꽝스럽지 않냐는 생각에 결행한 실험이었다. 무려 석달 동안이나 그렇게 했다. 그러고 나서 밝힌 소감은 이랬다. 불리한 면은 “노는 법을 다시 배워야 했다는 것” 정도였다. 긍정적인 면은 많았다. 자유시간이 늘었고 (손으로 쓰다 보니) 필체가 좋아졌다. 게다가 (여자친구 등과) 낭만적 감정 표현을 더 하게 됐다는 것이다. 필자에게 와닿은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그가 나와 똑같은 뜻으로 ‘낭만’을 쓰지는 않았겠지만, 어찌됐든 SNS를 떠나니 낭만이 돌아왔다는 말 아닌가. 낭만치곤 색다른 낭만이다. 

생각해 보면 제이크란 이 학생이 한 것은 정말 용기있는 실험인 듯하다. 요즘 시대에 석달을 각종 네트워크로부터 단절하고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 생각만으로도 몸이 떨리는 일일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제이크의 실험에 대해 이런 반응들이 나왔다. “SNS는 없이 살아도 스마트폰만큼은 결사적으로 지키겠다.” “대단하다. 나도 자주 이 ‘전자 끈’의 구속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렇지, 낭만 실종의 시대에 낭만을 찾는다는 게 어찌 쉬운 일이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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