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포먼스(행위예술)는 즉흥적·우연적인 게 특징이다. 2006년 2월3일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장례식에 모인 조문객들은 저마다 옆 사람의 넥타이를 잘라 고인의 시신 위에 올려 놓았다. 생전에 “넥타이는 맬 뿐 아니라 자를 수도 있으며, 피아노는 연주할 뿐 아니라 두들겨 부술 수도 있다”며 그런 행위예술을 연출한 적이 있는 고인을 추모하는 ‘마지막 퍼포먼스’였다.
이런 퍼포먼스는 어떤가. 엊그제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 시립극장에서는 남녀 배우 45명이 참가한 이색 퍼포먼스가 시작됐다. 배우들이 5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돌아가면서 무엇인가를 낭독하는 퍼포먼스다. 특이한 것은 이들이 읽는 게 무슨 문학작품이 아니라 아이슬란드가 2008년 10월부터 겪은 금융위기를 다룬 무려 2000쪽짜리 보고서란 사실이다. 의회가 15개월간 작업한 끝에 금융위기 보고서를 내놓자 이 극단이 낭독 퍼포먼스를 벌이게 된 것이다.
연합뉴스는 세계에서 가장 풍족한 국가 가운데 하나였던 아이슬란드가 하루아침에 최악의 재정위기 국가로 전락하게 된 원인을 살펴보자는 것이 취지라고 전했다.
보고서는 재정위기에 이르는 과정에서 게이르 하이데 당시 총리를 비롯해 다비드 오드손 중앙은행 총재, 전 재무장관 등 7명이 직무 수행에 극도로 부주의했다고 지적했다. 또 파산한 3대 은행의 외형이 7년간 20배나 커졌는데 그것이 세계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경제 전체를 붕괴시킨 주된 이유라고 결론지었다. 요컨대 비린내 나는 수산대국에서 유럽 금융허브로 급속도로 변신하면서 심화한 신자유주의적 모순을 버티지 못했다는 것이다.
소국 아이슬란드의 이색 퍼포먼스 소식은 우리를 돌아보게 만드는 계기도 된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한국전쟁 이후 최대 국난이란 외환위기를 겪고도 국가 차원의 공식 보고서나 백서 한 권 갖고 있지 않다. 그저 단편적 수사기록, 국정조사 보고서 정도나 있을 따름이다. 환란의 원인도, 책임자도 규명되지 않았다. 그저 ‘모두의 불찰로’ 그런 비극이 일어났고 의지가 모질지 못한 실직 가장들만 목숨을 끊었을 뿐이다.
무슨 퍼포먼스 얘기는 아니지만 일본은 축구 국가대항전에서 패하면 그 원인을 아주 면밀하게 분석한다고 한다. 엊그제도 일본 TV는 지난주 일본 대표팀이 세르비아에 완패한 경기를 다시 보여주며 패인을 요모조모 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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