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역사의 기록

여적 2010. 6. 18. 14:26

역사를 업으로 하는 역사학자를 빼고 역사란 말을 가장 즐겨 입에 올리는 사람은 정치인이 아닌가 한다. 이들은 역사를 창조하고, 역사의 죄인이 되며,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고 자주 말한다. 국가 지도자의 반열에 든 사람치고 “후세 사가들의 평가에 맡기겠다”는 식으로 말 안 해본 이도 드물 거다.
이 “역사가 증명…운운”의 상투성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자못 비장한 버전으로 진화하기도 한다. 사회비평가 진중권은 이를 패러디해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란 풍자적 제목의 책을 쓰기도 했다.

역사가 정치인들의 익숙한 수사가 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자신의 행동이나 정책에 역사성을 부여하면 득 되는 게 많다. 엄숙하고 진중하며 사려깊어 보인다. 그래서 속으론 권력게임, 정치공학적 계산에 애면글면, 노심초사하면서도 겉으로는 심오한 역사의식의 이끌림을 받는 것처럼 가장한다. 별 것 아닌 결정도 역사적 결단으로 분식되는 까닭이다.
천안함 사건 때 구조작업 중 순직한 한주호 준위 장례식장에서 벌어진 에피소드도 그 예다. 빈소에서 기념촬영을 한 공성진 한나라당 의원은 비난 여론이 일자 “역사의 기록으로 의미가 있다”고 해명했다. 이 정도면 무슨 개그 프로 수준이다.

청와대와 한나라당이 또 ‘역사의 기록’을 들고 나왔다. 세종시 수정법안이 국회 국토해양위에서 부결되더라도 이를 다시 본회의에 상정해 개별 의원들의 찬성 반대 내역을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것이다. 본회의로 끌고 가 봐야 부결될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원칙적으로 정치인이 역사를 의식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역사를 들먹이는 데는 미국 정치인들도 뒤지지 않는다. 링컨 대통령은 이들 역사 논쟁에 단골 소재로 나온다. 중요한 것은 그 진정성이다. 말로만이 아니라 얼마나 진심으로 역사와 대면하는가다. 이 점에 있어 이 정권이 말하는 역사는 의심받아 마땅하다. 그 용례가 매우 선택적, 자의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느닷없이 웬 역사 타령이냐는 생각이 든다.

세종시를 놓고 역사성을 말하기엔 이 정권은 너무 반역사적이다. 역사를 두려워한다면 민주주의와 인권이 이렇게 역주행할 수 없다. 지금의 반노동 정책은 역사발전을 거스르는 것이다. 우리 역사의 친일 청산에 대해 일관되게 부정적인 이들이 역사를 말하는 게 참으로 어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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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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