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사(特使) 하면 떠오르는 역사적 장면들이 있다. 1907년 4월 고종은 극비리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릴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정확히는 밀사를 파견한다.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만방에 폭로하기 위함이었다.
명을 받든 이들의 여정은 기구했다. 4월20일 서울을 출발한 이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과 합류해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6월4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 전 러시아공사관 서기 이위종과 만났다. 세 명은 6월25일 가까스로 헤이그에 도착했으나 일제의 방해와 각국의 외면으로 회의 참석이 좌절됐다. 이준은 7월14일 끝내 그곳에서 분사(憤死)했다.
1972년 7월4일 놀라운 특사 사건이 공개됐다.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입니다. 실은 제가 5월 초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뜻을 받들어 평양에 갔다 왔습니다.” 7·4 남북공동성명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후락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청산가리를 품고 다녀왔다고 한다.
71년 7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특별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 저우언라이와 만난 끝에 미·중정상회담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른바 핑퐁외교가 성공을 거두어 죽의 장막이 열리게 된 것이다.
모든 특사가 이렇듯 목숨을 걸고 또 거창한 역사적 과업을 수행하는 건 물론 아니다. 특사외교란 말이 보여주듯 특사는 외교의 한 양태로 받아들여진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성김 국무부 한국과장을 북핵 6자회담 특사로 임명했다. 어느 경우든 특사외교는 우리와 상대국 정부 사이에 꼬여있는 현안을 효율적으로 풀기 위해 구사된다 하겠다.
무늬만 특사 같은 경우도 있다. 한나라당 이상득 의원은 대통령 특사로 리비아를 방문하고 어제 귀국했다. 방문 목적은 카다피 국가원수에게 이명박 대통령 친서를 전달하고 트리폴리 도시철도 공사에 응찰한 한국기업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카다피는 얼굴도 못 봤다. 그럴만도 한 것이 외교부에 이 의원의 특사 일정이 통보된 게 출발 사흘 전이었다고 한다. 외교관례를 크게 벗어난 것이다. 그래서 특사는 명분이고 실상은 ‘영포게이트’의 소나기를 피해보자는 뜻 아니었겠느냐는 관측이 나온다. 사실이라면 영포회의 권력 사유화에 이은 ‘외교 사유화’라고나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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