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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웅 칼럼

위로받을 곳이 없구나

순복음교회는 “조용기 목사가 지진 피해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시하기 위해 말한 것이 의도가 잘못 전달된 것 같다”고 해명했지만, 그게 조 목사의 속마음을 제대로 전달한 건지는 의문이다. 성직자인 그가 정치인 흉내를 내 “진의가 잘못 전해졌다”거나 “본인을 음해하려는 정치공세”라는 식의 뻔한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일본 지진에 대해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 무신론, 물질주의로 나가기 때문에 (나온) 하나님의 경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 것은 진심이었다고 본다. 그 말이 저 유명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란 구호, 한국 보수 기독교의 단순명쾌한 사고구조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용기 목사 | 경향신문 DB

사회비평가 진중권은 조 목사에 대해 “정신병자 목사”라고 분노했다지만 그렇게 흥분할 일이 아니다. 일부 개신교 목사들은 조 목사의 용기있는 발언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 그 점에서 조 목사는 이들의 정서를 용기있게 대변한 것이 된다. 조 목사가 아니더라도 일본 지진을 두고 ‘불신자’들에게 지옥불이 떨어졌다고 풀이할 인사는 얼마든지 있다고 본다. 조 목사의 발언이 사회적 물의를 빚었다면 그것을 단순히 목사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로 바라봐야 하는 까닭이다. 

조목사 발언, 한국 기독교 현주소

탐욕과 독선에 사로잡힌 세상에서 상처받았다고 느낄 때 우리는 종교를 찾아 그곳에서 위로와 안식, 평화를 얻는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절박하게 위로를 찾게 만든다. 다른 곳에서 위로를 얻을 수 없을수록 더욱 그렇다. 때론 정치가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가 위로가 돼 줄까. 어림없다. 기본적으로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서민, 민생, 상생, 공정, 소통, 법치 등 수많은 가치들을 얘기했지만 하나같이 말 따로 행동 따로다. 신뢰할 수 없는 정치지도자로부터 위로받을 국민은 없다. 이 땅의 최고 기업이라는 삼성은 위로를 줄 수 있을까. 아니올시다다. 이 그룹 이건희 회장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방안으로 제시된 이익공유제에 대해 ‘듣도 보도 못한 용어’라며 강한 거부감을 드러낸 것을 보면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정부도 기업도 아니라면 교회는 어떤가. 불행히도 답은 아니다. 이 땅의 대형교회들은 정치·경제 권력 뺨치도록 탐욕적이며 권력화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사회에 편만한 탐욕과 독선, 물량주의에 제동을 걸기는커녕 앞장서는 모습이다. 조용기 목사는 일본 지진 얼마 전 이슬람채권법을 반대하며 이 법을 계속 추진하면 대통령 하야운동을 하겠다고 정부를 협박한 적이 있다. 지도자의 큰 국가정책이 잘못됐을 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 교회요 절이다. 장로 대통령이 나왔다며 우쭐하고 창조주의 권능을 거스르는 4대강 속도전에 대해서는 침묵하다가 자기 종교에 피해가 온다며 극렬히 반대하는 행태는 이기주의의 전형이다. 근본주의적 논리가 그렇듯 거기엔 예단과 비약이 많다. 

보수 기독교의 연합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체는 지난해 말 대표회장 선거를 둘러싸고 돈선거 논란과 징계, 법정싸움에 휘말렸다. 개신교 내 개혁파들은 한기총이 자정을 기대할 수 없을 만큼 썩었다며 해체를 주장하고 있다. 근본적 문제는 교회가 썩었다는 것, 그런 말이 나온다는 것을 교회 지도자들이 부끄러워하지 않는 데 있다. 한기총 대표회장 길자연 목사는 지난 선거가 어느 때보다 돈 안쓰는 풍토 속에서 치러졌다며 대규모 회개기도회를 열 것이라고 밝혔다. 

우리 사회 성찰 잃은 교회의 비극

김진 목사는 <왜 기독교인은 예수를 믿지 않을까?>란 책에서 많은 교인들이 ‘짝퉁예수’를 믿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란 말에 대해 “지옥을 무기삼아 남을 정죄하는 기독교는 예수와 상관없는 붕어빵 기독교의 아류”라고 비판했다. 평생 교회 종지기로, 동화작가로 병고에 시달리는 빈곤한 삶을 살다간 권정생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하지만 교인다운 티를 조금도 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언제나 약자들의 운명을 향해 열려 있었다. 그들에게서 예수를 보았다. 그런 권정생도 “교회를 증축하고 교인을 늘리고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데만 관심이 있는 교회는 망한 교회, 죽은 교회”라고 말했다. 

탐욕에 빠진 사회에서 위로받고 싶을 때 교회는 안식처인가. 물량주의에 집착해 본원적 성찰을 잃어버린 교회가 많다. 사람 아닌 신을 보란 말은 귀에 안 와 닿는다. 위로받을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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