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02.03.31 20:14
예루살렘 슈퍼마켓에서 며칠전 또다시 자살 폭탄테러가 발생했다. 테러리스트는 베들레헴 외곽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살던 18세 여성 아야트 아크라스로 밝혀졌다. 나중에 공개된 사진속의 그녀는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긴머리 소녀였다. 팔레스타인 여성에 의한 자폭테러는 올해초 처음 있었고 이번이 벌써 세번째다.
팔레스타인인의 자폭테러가 그동안 남성에 의해 감행됐다는 점에서 여성의 잇단 자폭테러는 더욱 충격적이다. 이스라엘은 이 사건 등 최근 몇건의 테러를 빌미로 팔레스타인에 대한 대대적 보복공격에 나서 중동을 최악의 위기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팔레스타인 여성 자살폭탄 요원 2007.05.22=뉴시스 자료사진
팔레스타인인에 의한 자폭테러는 2000년 9월 제2의 인티파다가 시작된 후 약 50차례나 터졌다. ‘자고 나면 자폭테러’란 생각이 들 정도다. 테러가 국제적 충격파를 일으킨 것은 벌써 오래된 일이지만 최근처럼 테러가 빈번히 발생하고 국제뉴스에서 비중있게 다뤄진 적도 없다.
그 큰 획을 그은 사건은 역시 9·11테러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바야흐로 ‘테러와 보복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또 테러에 대한 보복은 자위권이란 명분 아래 모든 비인권적 행위를 정당화하는 분위기를 형성했다. 이스라엘이 9·11 이후 팔레스타인에 대해 강공 일변도로 돌아선 것도 이런 기류를 반영한다. 미국은 지금도 아프가니스탄에서 대 테러전을 수행중이다.
9·11테러의 소용돌이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테러와 보복의 악순환을 바라보는 국외자의 입장은 다분히 양비론에 기울게 된다. 테러는 지탄받아야 하지만 테러에 대한 무차별 보복도 능사만은 아니란 것이다.
9·11테러 발생 직후 내게는 한가지 의문점이 떠올랐다. 그것은 백범 김구와 모하메드 아타 등 테러리스트들과의 근본적 차이점이 무엇이냐는 문제였다.
군국주의 일본이란 거대악과 싸워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백범은 테러를 선택했다. 1932년 그는 이봉창 열사와 윤봉길 의사에게 각각 천황 저격과 상해 홍구공원 폭탄투척을 지령했다. 백범은 자신이 이 사건의 책임자임을 주장했고 이로써 테러리스트 김구는 전세계에 알려졌다.
우리는 그의 ‘거룩한 분노’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품지 않는다. 그리고 백범의 테러와 알 카에다의 9·11테러, 팔레스타인인의 자폭테러는 시공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주장을 합법적으로 관철할 여지를 봉쇄당한 약자의 마지막 대안이란 결론을 얻는다.
노엄 촘스키 교수는 테러가 약자의 선택이란 해석에 대해 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즉 테러가 언제나 약자의 무기라고 볼 수 없으며 강자의 무기였던 경우가 많았다는 지적이다. 또 최악의 테러는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되는 테러행위라고 규정하고 따라서 ‘슈퍼테러리즘’에 맞선 저항은 불법적이라해도 정당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중동문제를 역사적으로 고찰할 때 미국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 등 아랍쪽보다 훨씬 ‘거부주의적’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유엔 안보리 결의를 식은 죽 먹듯 무시해왔다. 이럴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미국이란 기댈 언덕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간혹 이스라엘에 반대하는 시늉을 할 때도 있지만 이런 양비론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 편향으로 귀착된다.
테러에 대한 촘스키의 이런 진보적 입장을 6일전쟁이나 람보 신화에 길들여진 의식이 받아들이기에는 좀 껄끄럽다. ‘촘스키류’ 시각의 편향성을 지적하려는 점잖은 목소리도 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테러와 보복이란 도식이 증오의 확대재생산과 순교행위를 부추길 뿐 결코 유혈을 끝낼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며칠전 ‘악의 축’에 대한 소신을 재확인하며 대 테러전 지속을 다짐했다. 이스라엘은 세계의 비난여론에 아랑곳 없이 팔레스타인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고 있다. 촘스키가 미국·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관계를 ‘숙명의 트라이앵글’로 지칭하고 이 가운데 미국과 이스라엘을 거부주의란 ‘축’으로 묶은 것은 음미해볼 만하다.
〈김철웅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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