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분 사회’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울분 하면 떠오르는 소설부터 소개하고 싶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이다. “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 생각건대, 간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횡설수설로 일관한다.
‘나’는 증오심에 시달리며 삶은 우울하고 혼란하고 고독했다. 외부 세계에 대한 혐오는 자신에 대한 혐오로 이어졌다. 이 상태로 이십 년간 지하에 틀어박혀 있다. 그 바탕에 깔린 정서가 까닭 모를 울분이다.
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
소설 속 ‘나’의 울분이 막연한 것이었다면, 오늘날 한국인들은 좀 더 구체적인 ‘사회·정치적 울분’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최근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이 발표한 ‘한국의 울분 2018~2020 연속조사 결과’가 그렇다.
2018년 대비 시민들의 울분 평균점수는 1.73에서 1.58로 낮아졌다. 그러나 사회·정치 사안에 대한 울분 점수는 3.45에서 3.50으로 높아졌다. 올해 조사는 지난 1월21일부터 2월3일까지 성인 1200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사회·정치적 울분을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눈에 띄는 건 정치·정당의 부도덕과 부패가 4위에서 2위로 올랐다는 것이다. 입학·고용 관련 특혜도 10위에서 8위로 올랐다. 1위는 직장·학교 내 따돌림과 괴롭힘, 차별, 착취로 2018년 조사 때와 같았다.
필자는 조사 내용 중 ‘자신에게 울분을 안겨주는 일’을 묻는 답변에 ‘결국은 어떤 노력을 해도 다 소용없는 일이라고 느끼게 하는 것’이 5위에 새롭게 등장한 것에 주목한다. 이것이야말로 울분의 핵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울분(embitterment)과 분노(rage)는 다르다. 분노는 분하여 몹시 성을 내는 거다. 2016년 겨울 타오른 촛불 민심의 동력은 국정농단에 대한 분노였다. 이런 분노에 무력감이 겹친 감정이 바로 울분이다.
연구의 책임자 유명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이번 조사는 지난해 한국 사회를 관통한 정치적 갈등과 불공정에 대한 분노 등으로 사회 구성원의 울분이 높아졌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우리와 다른 나라의 ‘울분 점수’와 비교하면 어떨까. 유 교수 팀은 별도 조사에서 한국인 10명 가운데 4명이 일상생활에서 오래된 울분(외상후울분장애·PTED)을 겪고 있음을 밝혀냈다. 특히 극심한 울분이 전체의 10% 이상으로 이는 독일과 영국, 네덜란드의 4배가 넘는 수치라고 한다. 극심한 울분에 지속적인 울분을 더해 계산하는 ‘만성적인 울분’은 전체의 43.5%에 달했다.
자료:문화일보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번 연구에서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한 ‘코로나 블루’는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처음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건 1월20일로 조사 시기와 겹친다. 초기에는 사태가 이렇게까지 심각해지리라곤 예견하지 못했다. 지금은 세상을 팬데믹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엄청난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코로나 블루’까지 감안하면 울분 점수는 더 높아질 것이다.
울분을 탈출할 수는 없을까. 유 교수는 “시민들이 울분에 빠지면 사회적 신뢰가 낮아져 코로나 시국 같은 사회적 위기를 극복할 수 없는 만큼 사회를 공정하고 정의롭게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부정의’를 양산하는 사회를 변화시키지 않고 개인에게만 울분 극복이나 예방을 맡긴다는 발상은 말이 안된다. 울분 감정을 유발하고 악화시키는 사회문제를 찾아 관리해야 한다. 이게 바로 울분의 사회적 관리다.
그것이 개혁과 같은 말로 들리기도 한다. 지지부진한 사회개혁이 울분의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주병기 서울대 교수(경제학부)는 얼마 전 신문 칼럼 ‘개혁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가 부패하게 인식되는 이유는 재벌과 대기업의 횡포와 불공정한 시장질서, 공공부문과 권력기관의 부실하고 불공정한 감시·감독 기능,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들의 참여가 배제된 정치, 과장과 왜곡으로 진실을 가리는 언론, 이익집단의 과도한 정치적 영향력 때문이다.
이런 적폐가 만드는 부패와 불투명이 실력보다는 인맥과 배경으로 성공하는 썩은 사회 그리고 노동과 기술로 노력하는 사람들의 건강과 생명을 파괴하고 불행의 수렁으로 빠뜨리는 나쁜 시장이 지속되는 원리인 것이다.” 울분의 사회적 관리, 갈 길이 멀다. 2020.12.16 09:00
'논객닷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피니언타임스] 美 아시안 혐오 범죄 폭증...약자의 적은 약자? (0) | 2021.04.16 |
---|---|
[논객닷컴] 저출산 대책 왜 안 먹히나 (0) | 2021.01.18 |
[논객닷컴] 우리는 ‘플랫랜드’에 살고 있을까 (0) | 2020.10.09 |
[논객닷컴] 심화하는 사회적 갈등, 해소방법은 (0) | 2020.09.02 |
[논객닷컴] 대충하는 그린 뉴딜? (0) | 2020.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