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과 빈곤에 관한 뉴스가 일상적인 시대에 살고 있지만 옛날에도 그랬던 것 같다. 미국 경제학자 헨리 조지가 쓴 <사회문제의 경제학>을 보자. “브룩클린에서 발행되는 한 신문에서, 태어난 지 이틀 된 아기의 사망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배심원단이 소집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지저분한 방에는 부서진 의자, 형편없는 침대, 빈 위스키병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침대에는 죽은 아기의 엄마인 소녀가 흐트러진 자세로 누워 있었고, 의자에는 아기 아빠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인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도대체 경찰관, 경찰서, 빈민구호소, 자선단체는 무얼 했단 말인가?”

저자는 우리가 매일 신문에서 이와 비슷한, 아니 더 나쁜 기사를 접한다고 썼다. 책이 나온 건 1883년이다. 산업화 초기로 컴퓨터·TV는커녕 라디오도 보급되기 전이었다. 그럼에도 어제 일어난 일 같다. 재벌의 문어발식 사업 확장을 연상시키는 내용도 있다. “철도왕들은 지선 철도, 운송회사, 역마차 노선, 증기선 항로까지 지배하게 되며, 소도시를 만들거나 없앨 수도 있고, 운송이 필요한 사업을 하는 사람의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해서” 돈을 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빈곤 실태는 어떤가. 옛날 미국에 비해 절대적 빈곤층 비율이 줄어든 건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엔 없었던 개념, 즉 양극화와 이에 따른 상대적 불평등과 박탈감은 훨씬 심해졌을 것이다. 엊그제 보도를 보면 지난해 주택 보유 상위 1%(12만 9900명)가 보유한 주택 수는 91만 채였다. 2008년(10만 5800명, 36만 7000채)보다 54만 3000채 늘었다. 이에 따라 상위 1%의 1인당 보유 주택 수는 평균 7채로 10년 전에 비해 두 배나 증가했다. 상위 10%가 보유한 주택도 450만 8000채로 10년 전(242만 8700채)보다 207만 9300채 증가했다.

집값 안정과 서민들의 내 집 마련을 위해 정부가 신도시 등 주택 공급을 늘려도 결국 혜택은 다주택자에게 돌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사자인 경실련은 “다주택자들의 자산 가치는 크게 늘어난 반면 무주택자들은 내 집 마련 기회를 박탈당했고 집값 상승을 뒤따라간 전·월세 가격 부담으로 빚에 시달리면서 자산 격차가 더욱 심화됐다”고 지적했다.

가계소득 양극화도 역대 최악 수준으로 심해졌다. 지난달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2·4분기 소득 5분위 배율(최하위 20%와 최상위 20%의 소득 비율)은 5.3을 기록했다. 이 값이 클수록 소득 불평등이 심하다는 의미다. 최하위 20%인 1분위의 소득은 작년 2분기보다 0.04%(월 600원) 늘어난 132만 5000원에 그쳤다. 반면 최상위인 5분위 소득은 942만 6000원으로 전년 동기(913만 5000원) 대비 3.2% 늘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많다. 최근 보건복지부가 공개한 ‘2018 자살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자살 사망연도 기준 2년 연속 건강보험 의료급여 대상이었던 계층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66.4명으로 평균 자살률(2017년 기준 24.3명)의 2.73배에 달했다. 의료급여는 기초생활수급권자 등에 대해 본인부담금을 국가가 부담해주는 제도이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민부론' 발간 국민보고대회에서 프리젠테이션 발표를 하고 있다. 2019.09.22./뉴스1 © News1 김명섭 기자

그런 점에서 자유한국당이 얼마 전 내놓은 ‘민부론’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정부 여당이 추진해온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약발이 잘 먹혀들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제 1야당이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여 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소득주도성장론의 대안이 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황교안 대표는 이날 소득주도성장이 실패한 정책이란 것을 되풀이 강조하고, 경제정책의 대전환이 필요하다며 ‘특효약’을 써야한다고 주장했다. 민부론은 현 정부의 국가주도 경제를 민간주도의 자유시장 경제로 전환해 2030년까지 1인당 국민소득 5만 달러 달성, 2030년까지 가구당 연간 소득 1억 원, 2030년까지 중산층 비율 70% 달성을 골자로 한다.

경제 성장의 과실이 개인과 가계에 우선적으로 귀속되도록 해 국민이 부자가 되는 길이 ‘민부론’의 핵심이라며 국부 경제에서 민부(民富)의 경제로 경제활성화, 국가주도 경쟁력에서 민주도 경쟁력 전환을 제시했다. 그러나 민부론은 해묵은 시장근본주의를 다른 말로 포장한 것일 뿐이었다. 또 ‘어떻게’라는 설명이 빠져 구체성이 없었다. ‘안티 문재인’에 힘을 쏟다가 알맹이를 빠뜨린 것이다.

황 대표는 “심각한 천민사회주의가 대한민국을 중독 시키고 있다”며 예의 색깔론도 빼먹지 않았다. 근거 제시는 없었다. 천민자본주의는 들어봤어도 천민사회주의는 금시초문이다. 시대착오적 색깔론을 새것인 척 위장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란 생각이 든다.  2019.09.30 11:02

Posted by 김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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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분권과 균형발전은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때부터 우리 당의 기본 정치철학이자 문재인 정부의 핵심 정책이다.”(이해찬 대표) “지역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고도 절실한 명제다.”(박광온 최고위원)

지난 22일 더불어민주당이 연 민주당 소속 시도지사 간담회에서 나온 발언들이다. 참석자들은 ‘차질 없는 지방분권 추진’ 의지를 다졌다. 민주당 정부만 그런 건 아니다. 역대 정부는 수도권 인구분산과 균형발전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고심해 왔다. 그러나 그저 말뿐이다. 현실은 정반대다. 이런 말을 구두선(口頭禪)이라 한다.

1960년대 서울 광화문 네거리

증거는 차고 넘친다. 지난 21일 한겨레신문은 ‘극에 달한 수도권 쏠림…총인구의 50% 첫 돌파’라고 보도했다. 통계청이 최인호 의원(민주)에게 제출한 ‘최근 10년간 수도권과 비수도권 인구 추이’를 보면 7월 1일 기준으로 한국 인구는 5170만9000명인데 수도권 인구는 2584만4000명(49.98%), 지방 인구는 2586만5000명(50.02%)이다. 지방 인구가 2만1000명(0.04%) 많을 뿐이다. 이 전세는 8월이나 9월 중 역전될 것 같다.

서울·인천·경기 지역인 수도권은 국토의 11.8%인데 이미 인구 절반이 몰려 산다. 통계청 계산으로는 2030년 전후로 한국의 인구는 줄어들기 시작하는데, 이와 관계없이 수도권 인구 비중은 늘어난다.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다. 수도권 과밀화에 반비례해 지방 대도시 인구는 줄고 있다. 제2도시인 부산은 2010년 356만8000명이던 것이 2018년 344만1000명으로 줄었다. 대구, 광주, 대전도 추세는 마찬가지다. 인천만이 275만8000명에서 295만5000명으로 늘었다. 지방 중소도시들은 소멸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이미 2016년 전국 지자체의 30%가량이 ‘소멸 위험 지역’이란 보도가 나갔다.

오늘날 서울의 모습

신도시를 마구 건설하는 정책도 수도권 집중을 부추기고 있다. 수도권 1기 신도시는 분당·일산 등 5곳에, 2기 신도시는 판교·파주 운정 등 10곳에 들어섰다. 현정부도 5곳에 3기 신도시를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모두 20곳이다. 인구와 돈이 몰리든 말든 이런 정책을 쓰면서도 말로는 수도권 인구분산과 균형발전에 노력한다고 하니 이런 모순이 없다.

작가 이호철이 동아일보에 ‘서울은 만원이다’란 소설을 연재한 게 1966년이었다. 소설 속에 이런 대목이 있다. “서울은 넓다. 아홉 개의 구(區)에 가(街), 동(洞)이 대충 잡아서 380개나 된다. 이렇게 넓은 서울도 370만 명이 정작 살아보면 여간 좁은 곳이 아니다. 가는 곳마다, 이르는 곳마다 꽉꽉 차 있다.” 그 시절에도 서울은 만원이었다. 수치만 늘어났을 뿐(구가 25개, 행정동이 424개, 인구가 975만 명이 됐다) 서울은 그때나 지금이나 꽉꽉 차 있다.

서울 인구는 1992년 1090만 명을 정점으로 하향세인데, 아까 말한 대로 경기도에 대규모 신도시들을 건설한 탓이었다. 초만원인 서울 인구가 수도권으로 흘러넘친 셈이다. 덕분에 경기도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강준만 교수는 책 ‘바벨탑 공화국’(2019)에서 풍부한 사례를 동원해 서울의 초집중화 폐해를 분석하는데, 그중 이런 것도 있다. “다산 정약용은 위대한 선구자요 개혁가였다. 하지만 그런 위대한 인물조차 죽기 전 자녀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사대문 밖으로 이사 가지 말고 버텨야 하며 서울을 벗어나는 순간 기회는 사라지며 사회적으로 재기하기 어렵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서울 인구는 조선 초에 10만 명, 조선 말엔 20만 명이었지만, 1988년 1000만 명을 돌파했고 여타 수도권을 합해 전체 인구의 절반을 거느리게 됐다며 “정약용의 경고는 놀라운 선견지명”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중앙 지향성은 뿌리가 깊다는 설명이다.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란 속담도 떠오른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나빠지고 있다는 증거 중의 하나는 수도권으로의 중앙 집중화가 더욱 심화되었다는 사실이다”라고 개탄한다. 책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에서다. 그는 “비민주적 사회의 특징은 정치·경제·군사·문화적 권력과 영향력이 단일 중심으로 응집되어 있다는 것”이라면서 “그렇다면 국토의 0.6%에 불과한 서울이 전체 인구의 20% 이상을 차지하면서 모든 자원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게 된 형국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수도권 초집중을 막으려면 균형발전과 지방분권을 실천하는 것 뿐, 무슨 기발한 정책은 없다. 그런데 ‘서울은 만원이다’란 소설이 나온 게 53년 전이다. 그냥 체념하고 살아야 할까.  2019.08.28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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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고 있는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이걸 ‘역대급’으로 키울 수 없을까. 일본 측 반응을 접하면 특히 그렇다. 일본 언론에서는 ‘한국에서 벌어진 일본 불매운동은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며 이번 불매운동도 실패할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실제로 지금까지 4차례 불매운동이 있었으나 흐지부지 끝났으며 오히려 시장 점유율이 오른 품목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번엔 본때를 보여주지”란 마음이 절로 든다.

그러나 이 말에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불매운동을 ‘뭘 모르고 저지르는’ 반일 민족감정의 표출쯤으로 여긴다면 오산이다. 역사적으로 기억할만한 불매운동들은 단순한 감정 분출 차원을 넘어선 것이었다. 1905년 시작해 1911년까지 진행된 인도의 ‘스와데시(힌디어로 모국)’는 국산품 애용 및 영국 상품 배척 운동이었다. 그 결과 토산품의 수요는 증가하고 영국 상품 판매량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1920년대 한국에선 물산장려운동이 벌어졌다. 일제의 경제 수탈에 맞서 펼친 민족경제 자립실천운동이다. 구호는 ‘조선사람 조선으로’, ‘우리 것으로만 살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친일 세력의 방해로 쇠퇴하고 말았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항의로 미국 등 80개국은 이듬해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그 보복으로 소련 등 14개 나라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불참했다. 스포츠 행사에 국제정치적 요인이 개입한 경우이다. 한국처럼 시민들이 공동으로 특정 국가의 상품을 불매하고 나서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SNS에서 확산되고 있는 일본제품 불매운동 이미지

앞서 말했듯 일본에선 전례로 보아 ‘그러다 말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여기에 자유한국당과 일부 언론도 은근히 동조하는 분위기다. 한국당은 일본이 경제보복에 나선 뒤로 줄곧 정부 간 협상을 하라면서 자기 당에 ‘친일파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정치공세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의 전망대로 될까. 흐지부지 끝날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측면들이 있다. 우선 일본이 한국에 수출규제를 한 이유부터 모호하다. 일본 정부는 앞서 수출규제가 안보상의 문제라고 했다가 강제징용 배상 때문이라고 말을 바꾸는 등 안보와 역사 문제 사이에서 왔다갔다 했다. 이런 분석도 있다. “지난 21일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주변국 가운데서 의도적으로 때릴 상대는 한국뿐이었다. 선거는 끝났지만 개헌 목적을 이루기 위한 아베 일본 총리의 한국에 대한 공세는 계속될 것이다.” 그런 마당에 시민들이 자진해 불매운동을 철회한다는 건 이치에 안 맞다.

이것은 아베 정부의 극우적 성격과 관련 있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의 한계 때문이다. 협정에는 강제징용 피해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권에 관한 내용은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당시 협상 과정에서 일본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고 강제징용 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했다. 그러나 신일철주금 강제징용자 이춘식 할아버지 등 수많은 사례가 일본의 불법행위 때문이었고, 피해 배상은 당연한 것이었다.

장정욱 일본 마쓰야마대 교수는 효과적인 불매운동에 대해 조언했다. 그는 일본 여행을 자제하는 방식의 불매운동에 대해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한국인 관광객이 한 해 750만 명씩 일본을 찾는데 이 숫자가 줄면 일본 농수산물 소비는 물론 여행사와 숙박업 모두 타격을 입는다”면서 “효과를 보려면 적어도 6개월 이상 불매운동이 지속돼야 한다”고 말했다.

2018년 방일 한국인은 753만9000명, 방한 일본인은 292만1000명이었다. 인구 차이를 감안하면 엄청난 불균형이다. 2010년대 들어 이런 역전이 시작됐다. 한 누리꾼은 “일본 사람들은 가난해지고, 한국 사람들은 부유해져서 나타난 결과”라고 풀이한다(한국사회의 양극화 심화는 고려하지 않은 듯하다). 그는 “요즘 10~20대는 일본이 한국보다 잘 산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앞으로 1~2년간은 일본에 여행을 가지 않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불매는 싸움이 아닌 평화를 위함이다.” 며칠 전 평택 청소년교육의회 학생들이 내건 구호이다. 학생들은 결의문에서 “일본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비난, 비판하지 않는다”며 “국제사회에서 한국과 일본은 장기적인 긍정적 관계를 맺어야 함을 잊지 않도록 한다”고 밝혔다. 이런 열린 자세라면 역사적 불매운동이 되지 말란 법도 없지 않나 한다.

2019.07.29 09:14

 

 

 

Posted by 김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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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중국에 여행하고 온 지인한테 들은 말이다. 애국심을 고취하는 분위기가 대단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관영 중국중앙(CC)TV는 아침 7시 뉴스가 시작되면 곧바로 중국 국가인 의용군행진곡을 방영한다. ‘일어나라/ 노예 되기 싫은 사람들아/ 우리의 피와 살로/ 우리의 새 장성을 쌓자…’

방송 뉴스를 이런 전투적 국가로 시작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바로 지난달부터였다. 도화선이 된 것은 미국과의 무역 갈등이다. 미·중 무역 전쟁이 격화하고 중국 통신장비 제조업체 화웨이(華爲)에 대해 미국이 강한 압박을 해오자 정부가 착안한 게 국민들의 애국심이었다. 공산당 중앙판공청과 국무원 판공청이 올해 말까지 매일 오전 국가를 틀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신중국 창립 70주년(10월 1일)을 경축한다는 명목이기도 했다.

항일 전쟁 영화 ‘갱도전(Tunnel War)’ 주제가에 미·중 무역 전쟁 내용을 넣어 개사한 노래도 인터넷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웨이보(중국판 트위터)에는 애플 아이폰과 KFC, 맥도날드, 미국산 자동차에 대한 불매운동을 주장하는 글이 넘쳐난다. 국가주의는 국가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절대적으로 우선시하는 생각이다. 중국이 온통 국가주의의 열풍에 휩싸인 것 같다.

픽사베이

장면을 홍콩으로 돌려본다. 지금 홍콩은 중국의 국가주의·애국주의와는 사뭇 다른 시민들의 열기가 표출되고 있다. 수많은 홍콩 시민들은 올봄부터 홍콩 정부의 ‘범죄인 인도 조례’(송환법)을 반대하며 시위를 벌였다. 참여 인원은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민간인권전선 추산으로 지난 9일 103만 명이었고, 16일엔 200만 명에 육박했다. 홍콩 인구가 744만 명이니 27%에 해당한다.

그 열기의 실체는 무엇일까. ‘범죄인 인도 조례’가 문제가 된 이유부터 살필 필요가 있다. 발단은 지난해 초 한 홍콩 대학생이 대만에서 여자 친구를 살해하고 홍콩으로 도주한 사건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만과 홍콩은 범죄인 인도 협약을 맺지 않았고 홍콩은 속지주의를 채택하고 있어 그를 처벌할 수 없었다. 이것이 친중 의원과 홍콩 정부가 조례를 추진한 배경이었다. 시민들은 이 조례가 너무 포괄적이라 반중 인사들과 중국에 협조적이지 않은 인사들까지 모조리 잡아들일 수 있는 명분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홍콩 정부는 결국 송환 조례 검토를 무기 연기했지만 주최 측은 송환법 완전 철회, 시위에 대한 폭동 규정 사과, 캐리 람 행정장관 사퇴, 체포자 전원 석방 등 5대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시위를 계속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장정아 인천대 교수는 이렇게 진단했다. “이것은 홍콩인들이 자랑스러워했던 법치의 보장을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홍콩이 중국에 종속될 뿐 아니라 아예 홍콩이란 공간이 형체조차 없어질 것이란 위기감을 반영하고 있다.”

2014년 홍콩 ‘우산혁명’을 이끈 조슈아 웡(23)은 홍콩이 중국 본토와 달리 민주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중국이 홍콩에 적용하는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는 근본적인 사기”라고 했다. 중국은 ‘일국양제’를 약속한 50년 동안 ‘홍콩의 중국화’를 향해 가고 있지만 홍콩은 근본적으로 다른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웡은 자신의 최종 목표를 “홍콩이 하나의 완전한 민주·자유 지역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웡은 17살 나이로 행정장관 완전 직선제를 요구하며 우산혁명을 주도했다.

많은 홍콩 시민들이 간접선거로 뽑힌 중국 중앙정부의 꼭두각시는 필요 없다고 말한다. 지금도 홍콩 행정장관은 중국 국무원에서 정한 절차를 거쳐 임명한다. 이런 점에서 홍콩의 송환 조례 반대 시위는 2014년 좌절한 우산혁명의 속편 격이다. 크게 보아 민주화를 위한 투쟁인 것이다. 5년 전 시위는 79일 만에 강제 해산으로 끝났다.

홍콩 시위가 눈길을 끄는 이유는 우리의 촛불집회와 비슷해 보인다는 점도 있다. 앞서 웡도 “한국에서 일어난 촛불집회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말했다. 홍콩 시위대에 의해 한국의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절반은 한국어로, 절반은 광둥어로 불린 것도 흥미롭다. 하지만 중요한 건 촛불집회와 닮았다 안 닮았다가 아니라 그들이 바라는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국경을 넘어 연대하는 마음을 보내는 것이다. 2019.06.24 09:01

Posted by 김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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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과 고독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순우리말과 한자어란 싱거운 소리 말고. 둘 다 혼자 있는 시간인 건 맞지만 외로움(loneliness)은 상대방의 부재를 절감하는 상태, 고독(solitude)은 홀로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상태로 구분할 수 있다. 그래서 고독은 단련이란 어감이 있는 반면 외로움은 거기 빠져 허우적대는 느낌이 강하다.

 

지난해 초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트레이시 크라우치란 여성 의원(44)을 신설된 외로움 문제 담당 장관(Minister for Loneliness)에 임명했다. 그는 스포츠·시민사회 장관과 외로움 담당 장관을 겸임하게 됐다. 당시 든 생각은 이렇다. 외로움·고독이 안 좋다는 건 안다. 그런데 정부에 외로움 담당 장관까지 두다니, 영국인들도 많이 외로운가 보다.

픽사베이

며칠 전 정치철학자 김만권이 프레시안에 쓴 ‘나는 외로움 때문에 선거제도 개혁을 바란다’는 칼럼을 읽고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는 6600만 명의 인구 중에 900만 명가량의 영국인들이 외로움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조 콕스 위원회’ 조사 결과를 밝힌 뒤 이렇게 묻는다. “그래도 외로움 따위를 다루는데, 장관이 필요하다니. 속된 말로 너무 오버하는 것 아닌가?” 칼럼은 그러면서 선거제도 개혁이 필요한 이유는 경쟁적 소비사회가 만드는 집단적 외로움 때문임을 논증한다.

 

영국의 장관제는 우리와 달리 좀 복잡하다. 우선 장관(minister)이라 불리는 직책이 120개나 된다. 그중 내각회의에 참석하는 장관은 25명으로 ‘내각장관’(cabinet ministers, 또는 secretary of state)이라 부른다. 외로움 담당 장관직은 영어로 parliamentary under-secretary of state이다. 엄밀히 말하면 준장관(또는 정무차관)이지만 보통 장관이라고 부른다.

 

이런 차이를 감안해도 현대 사회의 ‘신종 전염병’인 외로움 문제에 적극 대처하기 위해 정부에 각료급 인사를 둔 의미가 퇴색하는 건 아니다. 크라우치 장관은 정부 정책에 대한 견해차로 11월 사임했고 동갑 여성인 웨일즈 준장관 마임스 데이비스가 후임에 임명됐다.

 

외로움 장관은 무슨 일을 하나. 그는 범정부 차원에서 외로움 대응 전략을 마련하기 위한 책임자 역할을 한다. 폭넓은 연구와 통계작업을 이끌며 외로움을 체감하는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사회단체 등에 자금을 지원한다. 원래 외로움 문제를 주도하던 인물은 조 콕스 노동당 의원이었다. 불행히도 그녀는 2016년 6월 브렉시트 국민투표 와중에 ‘영국 우선’을 외친 극우주의자에 의해 살해됐다. 그 뒤 구성돼 초당적인 활동을 해온 곳이 조 콕스 위원회다.

 

외로움은 정신적·신체적 건강을 해칠 개연성이 높다. 줄리언 홀트-룬스타드 미국 브리검영 대학 교수는 2010년 “외로움은 매일 담배 15개비를 피우는 것만큼이나 건강에 해롭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조 콕스 위원회는 “고독은 개인적 불행에서 사회적 전염병으로 확산됐다”면서 고독을 질병으로 규정했다.

 

지난해 4월 영국 외로움부는 실태조사를 발표했다. 그 결과 영국 16세 이상 인구 45% 정도는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중 5%는 “항상/자주”, 16%는 “때때로” 느끼고 있다고 답했다. “가끔” 느낀다는 응답은 24%였다. “거의, 또는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응답은 55%였다.

 

한국은 어떨까. 그 직후 한국리서치가 실시한 웹 조사 결과는 이렇다. 1000명에게 물어봤더니 응답자의 7%가 최근 한달 간 “거의 항상” 외로움을 느꼈다고 답했고, 19%는 “자주” 느끼고 있다고 답했다. 4명 가운데 1명이 상시적 외로움에 노출돼 있는 셈이다. 나머지 51%도 “가끔” 외로움을 느꼈다고 했고,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다”는 응답은 23%에 그쳤다. 한국인이 영국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도 영국처럼 외로움 문제를 국가적 차원의 문제로 인식하고 대처하는 건 어떨까. 한국리서치 질문에 40%는 한국도 정부 차원에서 대처해야 한다고 답했고, 46%는 정부가 나설 일은 아니라고 밝혔다. 짐작하건대 반대에는 이런 생각도 있을 것이다. 외로움 담당 장관, 지금이 그런 한가한 소리나 할 때인가?

 

그래서 얻는 결론은 이것이다. 중요한 건 외로움에 대한 인식전환이고 사회적 관심을 높이는 것이다. 한국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도, 늘어나는 고독사 문제도 ‘외로운 한국인들’과 떼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2019.05.22 09:05

Posted by 김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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