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 저차원이야’라고 하면 상당히 모욕적인 말로 들린다. 고차원이냐 저차원이냐 하는 구분이 인간성을 평가하는 잣대가 된 것이다. 이런 ‘차원’을 소재로 1884년 영국의 교육자이자 작가인 에드윈 에벗(1838~1926)이 쓴 흥미진진한 과학소설이 바로 ‘플랫랜드’이다. 납작한(flat) 세계(land), 즉 2차원 평면세계에서 살아가는 평면도형들 이야기다. 납작한 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
소설 '플랫랜드'의 표지. 저자는 정사각형(A Square)으로, 에드윈 애벗의 필명이다.
평면도형들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감정을 가지고 사고를 하며 사회생활을 하는데 그 모양은 성별과 신분에 따라 결정된다. 여성은 넓이가 없으며 양 끝점만이 있는 바늘과 같은 직선이다. 이러한 외형 때문에 충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므로 행동지침은 법으로 정해져 있다. 기억하는 능력은 없고 수치감도 느끼지 못한다. 여성과 달리 남성은 넓이를 갖는 평면도형이다. 하층 계급은 이등변삼각형, 중간계급은 정삼각형, 전문직 종사자는 정사각형이나 정오각형, 귀족은 정육각형 이상의 정다각형으로, 신분이 높을수록 변의 수가 많다.
플랫랜드의 주인공인 ‘정사각형’은 0차원의 세계 포인트랜드, 1차원의 나라 라인랜드, 그리고 3차원의 세계 스페이스랜드를 방문한다. 스페이스랜드는 플랫랜드에 위와 아래 공간이 더해진 세계로, 원근법이 존재하며 감성과 사랑을 중히 여긴다. 정사각형은 이곳에서 자기가 사는 2차원보다 높은 차원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3차원 세계의 복음을 플랫랜드 사람들에게 널리 전하려 했지만 불온한 사상을 전파한다는 이유로 종신형에 처해진다.
소설은 세태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담았기에 출간 당시 ‘정사각형(A Square)’란 가명으로 발표됐다고 한다. 그런데 그 풍자는 오늘날 우리 현실, 특히 정치판에 썩 들어맞는 것 같다.
사진= KBS 홈페이지 캡쳐
가수 나훈아가 공연에서 한 발언이 여야 설전으로 이어진 ‘사건’을 들여다보자. 그는 추석 연휴 첫날 KBS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공연에서 “국민 때문에 목숨 걸었다는 왕이나 대통령을 본 적이 없다”란 말을 했다. “국민이 힘이 있으면 위정자들이 생길 수가 없다”고도 했다. ‘위정자들’에 그만의 뜻을 담은 것 같다.
이에 대한 정치권 반응이 볼 만했다. 장제원 국민의힘 의원은 페이스북에 “잊고 있었던 국민의 자존심을 일깨웠다”며 “언론이나 권력자는 주인인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썼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긴급의원총회에서 “추석 전날 가수 나훈아씨가 우리 마음을 속 시원하게 대변해줬다”며 “우리 국민에게 남은 것은 국민 저항권밖에 없다”고 했다. ‘나훈아 콘서트에서 저항권까지’, 비약이 심한 거 아닌가.
여권은 반발했다. 박수현 전 청와대 대변인은 “가수 나훈아씨의 말이 문재인 정권에 대한 비판 민심인 것처럼 난리”라면서 “정치인들의 아전인수식 해석이 놀랍다”고 했다. 최영일 시사평론가는 라디오에서 “(정치권은) ‘신드롬’이 일어나면 항상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곤 한다”며 “나훈아가 말한 우리 국민은 1등 국민이란 격려를 왜 정부 비판으로 해석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국민은 이런 여야 설전에 익숙한지 오래됐다. 현안에 대해 아전인수적 해석을 하는 건 정부 여당도 거기서 거기다. 아들 군 복무중 특혜 의혹에 대한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국회 답변이 그렇다. 그는 올해 초 인사청문회를 비롯한 국회 답변에서 시종 ‘보좌관에게 지시하지도, 관여하지도 않았다’는 입장을 지켰다. 그러나 검찰 수사 결과는 추 장관이 보좌관에게 지원장교의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결과도 보고받았다는 것이었다.
추 장관의 거짓말 의혹에 대해 여당 대표는 적극적 비판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여당 인사들도 ‘지엽적 곁가지’라는 투다. 이런 태도는 추 장관에게 주어진 검찰개혁이란 막중한 과제를 염두에 둔 탓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국회에서 거짓말을 수차례나 한 법무부 장관이 어떻게 검찰개혁을 강력히 추진할 수 있을까 혼란스러운 사람들도 많다.
다시 차원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미국 국제정치학자 자카리 쇼어는 책 ‘생각의 함정(원제 Blunder)’에서 명민한 사람들조차 실책을 저지르게 만드는 인지함정 중 하나로 ‘평면적 관점’을 들었다. 1차원적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다. 우리의 상상력을 1차원적으로 속박해버리는 경직된 관점이다.
오로지 진영논리와 고정관념에 갇혀 사안을 이분법적으로 접근한다. 저자는 현실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대부분 중의적이기 때문에 평면적 관점의 함정은 우리의 이해와 인식을 제약하고 결과적으로 가장 단순한 해결책으로 이끌어 거의 반드시 실책을 저지르게 한다고 지적했다.
내가 플랫랜드에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은 언제나 사라질까.2020.10.09 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