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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신문 칼럼

[신문로] 러시아 군용기 영공 침범, 우발적 사건이었나

지난주 러시아 군용기가 독도 영공을 침범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23일 중국과의 합동훈련 과정에서 러시아 A-50 조기경보통제기가 두 차례 걸쳐 7분간 독도 영공을 침범했다. 우리 공군 전투기는 경고사격으로 360여발을 쐈다. 외국 군용기가 우리 영공을 침범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며칠이 지나 잠잠해지고 있지만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회성 사건으로 돌리기엔 석연치 않은 점들이 있다.

우선 한국과 러시아의 주장이 판이하게 다르다. 이튿날 윤도한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러시아 정부가 기기 오작동으로 계획되지 않은 지역에 진입한 데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전날 주한 러시아 대사관 차석무관(대령)이 우리 국방부에 이런 입장을 전달했다고 전한 것이다. 많은 시민들은 그렇게 알게 됐다.

그러나 이 발표는 몇 시간 뒤 뒤집혔다.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 군용기가 한국 영공을 침범하지 않았고 오히려 한국 전투기가 비행 항로를 방해하는 위협적인 기동을 했다”는 전문을 우리 국방부에 보낸 사실이 공개된 것이다.

어쩌다 이런 혼선이 빚어졌나. 러시아 전문 사이트 바이러시아 이진희 대표 생각은 이렇다. 신문사 모스크바 특파원을 지낸 그는 모스크바와 한국의 시차(한국―6시간)를 감안하면 러시아 대사관 차석무관이 유감을 표명한 시점은 러시아 측 공식 입장이 나오기 전이었다고 본다. 그래서 모스크바로부터 아무런 지시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외교적 용어로 ‘유감’을 표시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윤 수석은 그것을 러시아의 공식 입장으로 받아들여 덜컥 발표한 것이다. 그 뒤로도 러시아 정부 입장은 한결같이 ‘영공 침범 부정’이다.

러시아 정부는 한결같이 ‘영공 침범 부정’

러시아에서 나온 반응에는 ‘공중 난동’ 같은 과격 발언도 있었다. 러시아 공중우주군 장거리 항공대 사령관 세르게이 코빌라슈 중장은 타스 통신에 “분쟁 도서(독도)에서 가장 가까이 근접한 군용기와 도서간 거리는 25㎞였다”며 “한국 조종사들 행동은 공해 상공에서 벌인 ‘보즈두시노예 훌리간스트보(공중난동)’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공은 영토 및 12해리(22.2㎞) 영해의 상공을 말한다. 그는 경고사격 등을 수행한 우리 공군 차단 기동을 두고 ‘훌리건(무뢰한)’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 속담이 생각난다. 러시아는 잘못한 게 없다며 당당한 반면 영공을 침범당한 우리는 서둘러 문제를 매듭지으려는 분위기이다. 이렇게 조급한 이유로 이런 분석도 나왔다. 한국에서는 일본제품 불매운동 등 반일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지금은 일본에 화력을 집중할 때다. 러시아와 중국이 끼어들면 복잡해진다.

니콜라이 마르첸코(왼쪽) 주한 러시아 공군 무관과 세르게이 발라지기토프 해군 무관이 25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에서 러시아 군용기의 독도 영공 침범과 관련한 한·러 국장급 실무협의를 마친 뒤 로비의 이순신 장군 흉상 앞을 지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국방부는 러시아 대사관 무관들을 다시 불러 영공 침범 증거자료를 제시하고 관련 내용을 설명했다. 자료에는 독도 영공을 침범한 조기경보통제기의 항적 자료와 사진이 포함됐다. 군 당국자는 “경고방송, 차단 기동, 경고 사격 등이 DVR 등 기록장치에 담겼다”며 “러시아 측이 부인하기 힘든 증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러시아 측이 태도를 바꿀지는 회의적이다. 침범 사건이 나자 모스크바에서는 “러시아가 설령 한국 영공을 침범했다 하더라도 이를 인정하지는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그러면 진실 공방은 장기화할 공산이 크다.

태평양에서 미국과 맞선다는 구상

러시아의 독도 영공 침범은 치밀한 계산을 통해 시기와 장소를 선택한 전략적 도발일 가능성이 높다.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독도를 선택했고,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방한한 첫날을 골랐다는 게 그렇다. 지금 동북아 정세는 중·미 대결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한·일간 갈등이 심해지는 데다 남북관계나 북·미 관계도 유동적인 복잡한 상태다.

여기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020년까지 러시아 전력을 현대화한다는 계획을 이행하고 있다. 이에 따라 극동을 관장하는 동부 군관구는 특히 해상 전력을 급격히 보강하고 있다. 육상세력을 자처하는 러시아가 태평양에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해상세력과 맞선다는 구상에서다. 이번 독도 영공 도발이 그런 큰 구도의 일환으로 이뤄진 게 아닌가 한다. 2019-07-29 05:00:15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