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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 장벽

평소 ‘소통(疏通)’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이창동 감독은 문화부 장관 재직 때 문화를 ‘소통의 방식’으로 정의하고 자신이 할 일은 “집단과 집단, 세대와 세대 간의 소통 방식을 바꾸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퇴임 후 감독으로 돌아온 이유를 “영화가 소통의 유효한 수단이기 때문”이라고 밝혔을 정도로 소통론자였다.

오늘날 인류의 소통은 광속도다. 그 발달 속도도 너무 빨라 따라잡기 힘들 정도다. 10∼20년 전이 아니라 불과 1∼2년 전의 소통 수단과 방식도 어느새 구닥다리가 돼 버린다. 빠른 소통을 매우 중시하는 세계화 시대에는 온갖 유·무형의 장벽들이 급속도로 허물어진다. 그러나 이렇게 장벽들이 허물어지는 대신 다른 두터운 장벽들이 들어서는 기현상도 빚어진다.

1989년 11월 9일 동서 냉전의 상징물인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70년에 걸친 공산주의 실험의 실패와 동구권 해체 도미노를 알리는 서막이었다. 동독인들은 길이 164㎞, 높이 3∼4m의 콘크리트 장벽을 넘어 서베를린으로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이 세기적 사건은 동시에 이데올로기 장벽의 붕괴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소통을 거부하는 장벽들도 새롭게 건설되고 있다. 미국 상원은 며칠 전 멕시코와의 국경에 길이 595㎞, 3층 건물 높이의 콘크리트 장벽을 건설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불법입국 문제의 대책이지만 멕시코의 반발이 거세다. 또 미국 정치권에서도 이를 ‘우익 시대의 도래’라거나 11월 중간선거용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이스라엘은 테러방지를 명분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를 봉쇄해 버리는 높이 8m, 670㎞의 분리장벽 공사를 계속하고 있다. 이 장벽은 이미 상당수 팔레스타인인들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고 있다. 인도는 방글라데시와의 국경에 무려 4,090㎞의 ‘만리장성’을 쌓고 있다. 10억달러 이상이 투입되는 이 공사도 불법이민과 밀수 방지 등이 목적이다.

광속 소통 시대에 오히려 두터워지는 이런 장벽들이야말로 세계화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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